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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복·문익환이 반한 재야 동양사상가 기세춘 별세

등록 2022-05-07 11:39수정 2022-05-09 02:48

청 방역기획관 기모란 부친…성리학자 기대승 15대손
통혁당 사건 연루뒤 공장 설계일 하며 동양학 연구
묵자학회 창설자 묵점 기세춘 선생. 조현 종교전문기자
묵자학회 창설자 묵점 기세춘 선생. 조현 종교전문기자

동양철학자 묵점 기세춘 선생이 6일 오후 별세했다. 향년 88.

고인은 병환으로 지난해 3월 대전 자택에서 충남 금산효사랑요양원으로 옮겨 치료해왔다.

고인은 묵자를 비롯한 동양사상과 민주화·통일운동을 접맥시켜 민주화운동과 사상계에 영향을 미친 재야 사상가였다. 고인은 퇴계 이황과 조선 성리학의 최고 논쟁인 사단칠정론쟁을 벌였던 고봉 기대승의 15대손이다. 구한말 호남의병대장이던 기삼연이 큰할아버지였다. 그의 조부인, 기삼연의 동생 기동우는 전남 장성에서 전북 정읍으로 이주해 서당 훈장 했는데, 정읍에서 태어난 그는 기동우의 가르침을 받아 10살에 사서삼경과 주역까지 뗐다고 한다. 전주사범고 재학 때 이승만 타도를 외치며 의혈동지회를 결성했다. 그는 교사와 공무원을 거쳐, 전주사범고 선배이자 <껍데기는 가라>의 시인 신동엽이 편집주간으로 있던 <교육평론>에 취재 부장으로 일하며 사월혁명연구회를 창립했다.

1963년에는 동학혁명연구회를 발족시켜 초대 회장을 맡아 근대화 과정에서 서양 것에 비해 저열한 것으로 치부된 우리 것의 재발견을 위해 동학 지도자 전봉준의 법정 심문 기록인 ‘공초’를 독회하며 공부했다. 당시 동학연구회 학술위원장을 맡았던 신영복이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체포돼 1심과 2심에서 사형, 대법원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무려 22년을 복역했다. 이 사건에 연루돼 더 이상 직장을 얻기가 어려워진 고인은 공장에서 기계 설계를 해 현 대통령비서실 방역기획관인 딸 기모란을 비롯한 식구들을 부양하면서 동양학 저술을 써갔다.

묵점 기세춘 선생이 말년에 해설한 다산 정약용의 주역대전 원고를 들어 보이고 있다. 조현 종교전문기자
묵점 기세춘 선생이 말년에 해설한 다산 정약용의 주역대전 원고를 들어 보이고 있다. 조현 종교전문기자

그의 탁월한 한문 실력과 안목은 신영복도 감복할 정도였다. 감옥에서 노촌 이구영으로부터 한문과 서예를 배운 신영복은 출소한 뒤 노촌이 설립한 이문학회에서 강의하라는 요청을 노촌으로부터 받자 ‘나보다 한문을 제대로 배운 기세춘 형이 맡아야한다’며 기세춘이 노촌의 강맥을 잇도록 했다. 또한 신영복은 ‘다시 기세춘과 얽히지 마라’는 주위의 강권을 물리치고, <중국역대시가선집> 4권의 방대한 저서를 기세춘과 공동으로 번역해 세상에 내놨다.

그는 어린 시절 사서삼경을 뗐지만 독실한 그리스도인이었던 할머니를 위해 부친이 마을에 세운 교회에 다니며 목사가 되려고 했고, 젊은 시절엔 한때 입산해 산사에서 지내기도 했다. 그는 이승만의 친위대에 의해 부친이 두들겨 맞은 것을 보았고, 한의사였던 외삼촌은 ‘좌익들의 즉결 처분’을 내세운 독재자들에 의해 목숨을 잃고, 순천에서 경찰을 하던 큰 매형은 여순사건으로 숨지는 일도 경험했다. 고인이 천하무인(天下無人·천하 만민은 모두 남이 아니라 한 형제요 동포)이라고 표현한 묵자 사상에 심취한 것도 그런 분열과 갈등과 증오와 살육을 극복한 진정한 화해의 길을 열고 싶어서였다. 그의 호 묵점도 묵자와, 고향 먹점마을에서 한 자씩 딴 것이다.

2019년 강원도 홍천의 기독교공동체인 밝은누리에 초청을 받아 강연후 최철호 교장을 비롯한 밝은누리 공동체원들과 기념촬영을 한 기세춘 선생. 조현 종교전문기자
2019년 강원도 홍천의 기독교공동체인 밝은누리에 초청을 받아 강연후 최철호 교장을 비롯한 밝은누리 공동체원들과 기념촬영을 한 기세춘 선생. 조현 종교전문기자

그는 제자백가 가운데 공자·유가와 쌍벽을 이루던 묵자를 알리기 위해 묵자학회를 만들었고, 1992년 <묵자-천하에 남이 없다>란 책을 내 반전, 평화, 평등의 묵가 사상을 널리 펼쳤다. 고인보다 19살 연상인 문익환 목사는 감옥에서 고인의 이 저서를 읽고 편지를 주고받았다. 이 서신 논쟁은 <묵자와 예수>라는 책으로 출간돼 화제가 되었다. 이 서신에서 문 목사는 “묵자와 예수는 한 줄기에서 뻗은 두 가지인 쌍둥이 같다”고 소회를 밝히며 기독교 개혁의 불씨를 지피도록 기 선생에게 묵자교회를 열라고 격려하기도 했다.

고인과 문익환 목사는 ‘모세의 야훼 신앙’을 두고 격론을 펼치기도 했다. 기 선생은 ‘유목민의 신인 야훼는 전쟁과 살육의 신이었고, 인간은 야훼의 종에 불과했다’고 했고, 문 목사는 ‘유목민은 농경지에서 밀려난 소외계층이었으며 평화와 평등을 원했으므로 애굽의 종이 된 히브리 노예들의 해방을 위해 발 벗고 나선 야훼는 세계를 침략, 정복, 착취한 백인 기독교의 신과 같을 수 없다’고 반박했다.

고인은 말년에 주희의 주역 해석과 달리 독자적으로 주역을 해설한 다산 정약용의 주역 해설서를 3000장이 넘는 원고로 마무리해 출간을 준비 중이었다.

고인은 10여년 전 전립선암 선고를 받고도, 지인들과 막걸리를 주고받으며, 권위를 벗은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동양의 고준한 정신세계를 나누어주곤 했다.

유족으로는 배우자 변삼순, 아들 기검, 효선, 딸 기모란, 사위 이재영, 며느리 최경미 등이 있다.

선생의 빈소는 남대전장례식장(대전 동구 산서로)이며 발인은 오는 8일 오후 2시다. 장지는 대전시립묘원이다.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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