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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지 말라”던 성철스님이 만권의 책 갖고 있던 까닭은

등록 2023-04-25 16:10수정 2023-04-29 13:35

경남 합천 가야산 해인사 백련암에 보셔진 성철스님 상을 가리키며 은사스님을 회고하는 원택 스님. 조현 종교전문기자
경남 합천 가야산 해인사 백련암에 보셔진 성철스님 상을 가리키며 은사스님을 회고하는 원택 스님. 조현 종교전문기자
성철스님(1912~1993)은 경남 합천 가야산 백련암을 지키며 거의 산문 밖을 나가지 않았다. 그를 친견하려면 백련암에 가서 불전에 3천배를 해야 했다. 누더기를 입고 산에서만 지내던 산승이 열반하자 해인사에서 고속도로 톨게이트까지 수십리 길에 걸쳐 그의 마지막을 보려는 이들 수십만명이 모여들어 세상을 놀라게 했다.

장좌불와(일체 눕지 않고 수행정진)에 이어 1967년 50대의 나이에 해인사 방장에 올라 동서양을 넘나든 현학과 깨달음으로 잠자는 중생을 일깨웠던 그가 열반에 든 지 올해로 30년이 됐다. 성철 스님 생전에 23년을 시봉하고, 사후엔 백련암을 지키며 백련불교문화재단과 도서출판 장경각을 통해 성철 사상을 전하고 있는, 성철 스님의 ‘영원한 시자’ 원택 스님(80)을 24일 백련암에서 만났다.

성철 스님이 ‘책을 보지 말라’고 한 발언은 세상에 많이 알려져 있다. 그런데 백련암에 전에 없는 새 전각이 들어서 있다. 성철 스님의 장서 1만여권을 새로 보관하고 전시할 장경각이다. 장경각은 성철 스님 열반 30주기(11월4일) 즈음에 개관할 예정이다. 성철 스님의 수좌5계(수좌들이 지켜야할 다섯가지 계율)와는 어울리지 않아 보이기도 하는 전각이다. 성철 스님이 선승들에게 내린 다섯가지 지침은 △잠 많이 자지 말라 △말 많이 하지 말라 △책 보지 말라 △많이 먹지 말라 △간식 먹지 말라는 것이다.

“백련암에서만 (성철)스님을 모시다 보니, 수좌5계라는게 있는 줄도 몰랐다. 그런데 스님이 열반에 드신 뒤 수좌5계라는 게 알려지면서, 법정 스님조차 ‘당신(성철스님)은 만권의 책을 가지고 있으면서 다른 사람은 책을 보지 말라는 것이 말이 되느냐’고 따져 얼마나 당황스러웠는지 모른다. 그래서 스님의 도반인 서옹 스님(조계종 전 종정)을 백양사(전남 장성)에서 뵀을 때, ‘왜 우리 스님이 그런 말씀을 하셨을까요’라고 물으니, ‘허허 원택이도 답답하구나’ 하시며, ‘선방에서 화두를 들고 정진하는 수좌들에게 화두에만 마음을 모으도록 책 보지 말라는 것이지, 다른 사람들한테까지 책 보지 말라는 소리가 아니다. 멀쩡한 사람들까지 책 보지말고 무식해지라는 소리가 아니란 말이다’고 풀어주셔서 시름을 놓았다.”

지금 백련암에서 보관하고 있는 성철 스님의 책 가운데 소장 가치가 큰 것은 19세기부터 해방 전까지 출간된 2500~3000권가량의 책이다. 이 가운데 1500권은 1947년 경북 문경 대승사에 머물 때 고서적 수집가 김병용씨로부터 기증받은 희귀 불교서적 1500권이다. 그 외 성철 스님이 직접 구입한 고서적도 400~500권가량이다. 성철 스님은 책 욕심이 남달랐던 듯하다.

“일본에서 나온 100권의 신수대장경을 갖고 싶어했다. 해인사 자운스님이 한 질을 가지고 계셨는데, 연세가 드시고 서가를 정리하면서 상좌인 지관스님(전 조계종 총무원장)에게 줘버리자 스님께서 ‘나한테 자랑하길래 나 줄라고 그런 줄 알았더니 결국 자기 아들(상좌)한테 주데’라고 아쉬워하셨다.”

성철 스님이 생전에 달력 뒷면에 쓴 육필 메모. 백련불교문화재단 제공
성철 스님이 생전에 달력 뒷면에 쓴 육필 메모. 백련불교문화재단 제공

성철 스님이 생전에 달력 뒷면에 쓴 육필 메모. 백련불교문화재단 제공
성철 스님이 생전에 달력 뒷면에 쓴 육필 메모. 백련불교문화재단 제공
성철 스님은 일본 잡지 <대법륜>을 구독해 거기에서 나온 책을 원택 스님에게 서울 서점에 가서 구해오도록 했다. 그런데 책을 사드리면 처음부터 끝까지 보시는 줄 알았는데, 책 중간에 줄이 좀 그어져 있을 뿐 별로 본 흔적이 없었다.

“‘왜 그렇게 책을 보느냐’고 물었더니, ‘아무개 교수가 기존과 다른 학설을 내놨다고 하니, 그것만 찾아보면 되니, 뭘 다 볼 필요가 있느냐’고 했다. 학문적 토론이나 논쟁을 유념해 뒀다가 그것만 보곤했다.”

성철 스님이 50대에 해인사 방장이 되어 백일법문을 하면서 불가에선 듣도 보도 못한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과 물리학을 들어 법문을 하고, <타임>까지 인용하자 성철 스님이 영어까지 능통하다는 소문이 났다. 그러나 원택스님은 “스님께서 궁금해하는 <타임>의 기사 등은 영어를 하는 상좌(제자)가 번역해 드렸다”고 전했다. 하지만 정식 학력은 소학교만 마쳤으면서도 성철 스님은 박식했다고 한다.

“절친한 도반인 청담 스님으로부터 자기 딸을 출가하게 해달라는 부탁을 받고, 훗날 비구니계 거목이 된 묘엄스님을 출가시키려 하자, 묘엄 스님은 성철 스님에게 ‘스님이 아는 것을 다 가르쳐주면 출가하겠다’고 했다. 묘엄스님 생전에 들어보니, 성철 스님이 역사노트를 직접 만들어 가르쳐줬는데, ‘단군부터 독립운동가 김구까지 모든 시대를 망라했다’고 한다.”

원택 스님은 또 성철 스님이 참선 수행이나 독서만 한 게 아니라 젊은 시절 노동을 직접 했음을 전했다. 그는 “스님은 부잣집 장남인데도 손이 투박했다. 파계사 성전암 살 때까지도 하루에 나무를 두짐씩 장작을 패고 채소를 가꿨는데 백련암에 와서야 다칠 것을 염려한 상좌들한테 지게를 빼앗겨 더 이상을 지게를 못 졌다”고 했다.

성철 스님은 매일 한장씩 찢어내는 달력 뒷면을 재활용해 꼼꼼하게 메모했다. 그 육필 원고를 정리한 원택 스님은 “‘봉암사의 꿈’, ‘봉암사에 대한 기대’란 말이 유난히 많았다”고 했다.

“억불숭유의 조선시대와 일제시대를 거치며 무너져 내린 승가의 수행풍토를 일신해 한국불교를 제대로 세워보고자 봉암사 결사에 모였던 스님들이 한국전쟁 발발로 흩어져 제대로 된 수행자를 길러내려던 꿈이 좌초되자 한이 서렸다. 그러나 파계사 성전암에 옮겨서도 봉암사의 결의를 한 치 어긋남 없이 지켜내며 살았다고 한다.” 추락하는 한국불교를 다시 세워야한다는 게 성철스님의 오매불망 염원이었다는것이다.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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