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홍천 밝은누리공동체에서 강연하고 있는 기세춘 선생. 조현 기자
작년 기세춘 선생님께서 돌아가시고, ‘향년 88’이란 단어를 쓰면서, 새삼 선생님의 연세에 놀랐다. 내 무의식속의 선생님은 ‘만년 청춘’이었던가 보다. 근현대화 과정에서 유학의 서당 훈장이 보수적인 ‘꼰대’란 비속어로 불리기도 했지만, 기 선생님은 한마디로 ‘꼰대기질’이 없었다. 그가 만나는 대부분이 그로부터 배우는 제자벌이었지만, 그는 누구나 친구처럼 허심탄회하게 대했다. 더구나 오래 전 암 선고를 받고도 암을 개의치 않고 막걸릿잔을 기울이는 모습은 탈속한 해탈도인의 경계였다.
“조 기자, 얼른 내려와. 막걸리 한잔 하게”
전화를 드릴 때마다 선생님은 ‘어서 내려오라’고 채근했다. 만약 바쁜 현직에 있지 않거나 선생님이 수도권에라도 사셨더라면, 그야말라 며칠이 멀다고, 선생님과 막걸리를 기울이며 그 굉사박학(宏詞博學)의 세례를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2019년엔 강원도 홍천 밝은누리의 초청으로 기 선생님을 모시고 가서 2박 3일을 함께 했다. 밝은누리는 자본주의적 탐욕의 삶을 떠나 기독교공동체이면서 천·지·인과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는 아름다운 마을이다. 종교를 넘어 다양한 인문학적 탐구를 내면화해 삶을 더욱 풍성히 가꾸는 그들은 6개월 동안 100명이 넘는 공동체원들이 기 선생님이 쓴 <묵자>를 착실하게 공부했다. 묵자공부 마지막 과정으로 기선생님을 모시고 묵자강의를 듣고 싶다는 밝은누리 창설자 최철호 목사의 요청에 따라 기선생님을 모시고 가는차 내 강의시간도 마련되었는데, ‘내 강의비는 안 받을 테니, 대신 기선생님이 드실 막걸리를 준비해달라’고 청했다. 그래서 이 공동체가 만들어진 지 30여년 만에, 그 마을 밖 게스트하우스에서 기 선생님을 모시는 막걸리 파티가 펼쳐졌다. 인문학을 전문적으로 공부하는 학도들도 아닌, 평범한 공동체원들, 어른부터 아이들까지 수백명이 두 눈을 반짝이며 노선생님의 일거수일투족에 귀를 기울이는 모습은 정겹기 그지없었다. 선생님도 밝은누리를 떠나면서, 이제 이런 강연을 다니는 것도 이것이 마지막이라는 것을 직감한 때문인지, 기 선생님을 극진하게 모신 최철호 목사와 헤어질 때는 눈시울을 붉혔다.
그 뒤로도 선생님께서 “언제 오냐”고 성화를 하셔서, 대전에 내려가 선생님의 단골 주막에 들러, 둘이서 막걸리를 거나하게 마시고, 선생님 댁에 들어가 잠을 잤는데, 아침이 되자 선생님은 편의점으로 가셔서, 즉석 밥이야 즉석 반찬들을 여러 가지 가져다 놓고 취향대로 먹으라고 하셨다. 편찮으신 사모님과 사시면서, 선생님도 쇠잔해가는 모습을 뵙고 나니 가끔 전화를 드리면 마치 눈감기 전에 자식을 찾는 부모처럼 애달프게 찾았다. 선생님께서 요양원에 들어가기 전에 전주에 가서 선생님을 지극정성으로 모신 소춘수 사장의 차를 타고, 한옥마을에서 막걸리를 마시고, 다음날 금산사 일대를 관광해 별리의 아쉬움을 조금이나마 덜 수 있었다.
전주 한옥마을 경기전에 모신 공자 진영 앞에 선 기세춘 선생. 조현 기자
선생님의 육신이 기울어가는 게 역력해지자 선생님의 모습을 유튜브 ‘조현TV휴심정’에 남기기 위한 준비에 들어갔다. 유튜브는 기 선생님 같은 인간박물관이 떠나기 전 기록을 남겨두기 위해 만든 것이었다. 선생님과 인터뷰 약속을 잡고, 만사를 제쳐놓고, 선생님의 <동양고전산책1,2>와 <예수와 묵자>를 탐독하면서 대담할 내용을 정리했다. 그런데 정작 약속 날이 가까워 아무리 전화를 드려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 간혹 전화를 받으실때는 “내가 요즘 이상해졌어. 이상해졌어”라고 했다. 마침내 약속 날 아침에 다시 전화를 드리자 아들 기검씨가 받아 “치매증상으로 대화를 하기가 어렵고, 요양원에 모시기로 했다”고 전했다. 선생님이 가시기 전 생음을 녹화해두리라는 계획은 이렇게 수포로 돌아갔다. 그러나 다시 한번 선생님의 책을 탐독하면서, 선생님의 진면목을 새삼 확인할 수 있었다. 기선생님은 “조 기자가 나를 세상에 알렸다”고 말씀하곤 했는데, 천부당만부당한 말이었다. 허장성세에만 현혹되는 세상의 수준이 기 선생님 같은 재야의 숨은 고수를 제대로 발굴하지도 진면목을 알아보지도 못한 것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수천년간 틀에 박힌 동양고전에 대한 해석 틀을 기 선생님만큼 깨고 부수어 법고창신한 인물이 어디에 있었던가. 기 선생님은 틀을 깨기 위해 태어나신 분인것만같다. 한문고전실력도 탁월하지만, 한문고전만으로는 그만한 실력파가 없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할머니를 위해 부친이 마을에 세운 교회를 다니며 목사가 되려고 할 만큼 동양사상에서 기독교를 접붙인 듯 일찍부터 동서양의 회통을 경험한 그의 안목은 한가지 종교나 한가지 사상에 붙들린 학자들과는 완연 다른 기풍을 내보였다. 그는 또 한때엔 입산해 산사에서 살며 불교를 접했다. 유·묵·불·기독교·동학과 동양과 서양, 과거·현재·미래가 ‘기세춘’ 안에서 태극처럼 회오리쳤다. 더구나 기고봉의 후예인 조부모와 부모뿐 아니라 신동엽시인, 신영복 교수, 김대중, 문익환 등 그는 한국사의 주역들과 함께 어우러지며 사상의 한류, 현실의 한류를 배태했다.
전주 한옥마을에서 오른쪽부터 기세춘 선생, 소춘수 선생, 조현 기자. 조현 기자
그는 10살에 사서삼경과 주역까지 떼고서도, 유학의 이단아 묵자를 들고나와, 2500년간 벽장 속에 갇힌 동양 사상계의 창을 열어젖혔다. 의병장의 후손이면서 민주화를 위해 몸을 던지고, 기독교를 사랑하되 야훼를 폭력배로 몰아세우며, 고차원의 하나님을 우리 민족의 고유사상을 통해 제시했다.
‘마음엔 두려움이 없고/머리는 높이 쳐들린 곳/지식은 자유스럽고/좁다란 담벽으로 세계가 조각조각 갈라지지 않는 곳/진실의 깊은 속에서 말씀이 솟아나는 곳/끊임없는 노력이 완성을 향해 팔을 벌리는 곳/지성의 맑은 흐름이/굳어진 습관의 모래벌판에 길 잃지 않는 곳’
타고르의 <동방의 등불>이란 시를 읽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인물이 바로 기세춘이다. 오직 저만 옳다는 아집과 편당, 탐욕에 물든 자들이 풍기는 고린내가 여전히 진동하는 세상에서 기세춘은 오래 묵은 벽장 같고 창고 같은 두개골과 가슴에 불어오는 솔바람이었다.
***이 글은 기세춘 선생 1주기 추모집에 실린 조현 기자의 추모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