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주류 동지애로 뭉친 이정배·이은선 부부는 강원도 횡성 산골 현장아카데미에서 또 다른 길을 상상한다.
지난 6일 강원도 횡성군 갑천면 갑천로 760번길 골짜기에 있는 현장아카데미를 찾았다. 감신대 종교철학과 교수를 지낸 이정배(65) 목사와 이은선(62) 세종대 명예교수 부부를 찾아서다. 이들은 개신교뿐 아니라 종교·사상계에서 바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만큼 분주한 ‘참여형’이다. 기독자교수협의회장을 지낸 이 목사는 2017년 퇴직 후엔 생명평화마당을 창립에 함께해 성직자와 남성 위주와 성장제일주의에 물든 개신교계에 탈성직·탈성별·탈성장을 기치로 작은교회운동을 펼쳤다. 이 교수의 활동도 그에 못지않았다. 남성 위주의 교계와 신학의 아성에 도전해 새 길을 연 여신학자협의회의 공동대표와 여성신학회 회장을 지냈다. 창립 40주년을 맞은 여신학자협의회 40주년 기념준비위원장도 맡고있다.
그런 활동가들이 일주일째 이 깊은 산골에 머물다니. ‘코로나’로 인한 ‘집콕’ 때문만이 아니다. 부부는 서울에선 종로구 부암동 자택에서 다양한 이들과 공부 모임을 하고 사회적 목소리를 내다가도 어느새 이 산골로 숨어들곤 했다. 벌써 20년째다. 유학자인 류승국 교수가 생전에 이 집을 ‘나타날 현’(顯)과 ‘감출 장’(藏)을 써 현장아카데미로 작명해준 것처럼 신출귀몰해온 것이다. 2만6천여평에 심어놓은 온갖 산나물, 정성스레 가꾼 나무와 꽃과 돌 하나하나가 산골지기임을 말해준다.
부부의 20년 손길이 스며 있는, 강원도 횡성 갑천면 현장아카데미.
한길로만 가기에도 바쁘다는 시류에 거스른 독특한 삶은 40년 전 두 젊은이의 맞선으로 예비된 것인지 모른다. 맞선 자리에 애제자 이정배를 데려온 이는 변선환(1927~95)이었다. 그는 감신대 대학원장과 학장을 지냈으나 타 종교에 개방적이고 포용적인 입장을 취하다가 금란교회 김홍도 목사 등이 주도한 교리수호대책위원회로부터 교단 사형선고인 출교 조처를 당한 인물이다. 딸 은선의 손을 잡고 나온 이는 변선환의 ‘절친’인 이신(1927~81)이었다. 이신은 1960년대 마흔살 늦깎이로 미국 남부의 명문 밴더빌트대학에 유학해 석·박사를 마쳤다. 영어·일어·히브리어·헬라어까지 능통한데다 뛰어난 화가이기도 했지만, 미국식 그리스도교가 아닌 한국식 토착적 그리스도교를 펼치며 소외된 삶을 살다가 54살에 세상을 떠나고 만 비운의 천재였다. 은선은 여기저기서 맞선이 들어오던 미모의 이대 졸업반이었다. 시골 출신으로 감신대 대학원을 마치고 군 복무 중 휴가를 나온 상병이던 이정배에게 이신은 ‘부모가 뭐 하시는 분이냐’는 말 한마디 묻지 않고, ‘석사학위 논문 잘 썼더군’이라며 결혼을 승낙했다. 석사 논문은 ‘프리츠 부리의 기독론’이었다.
스위스 바젤대학에 막 유학을 간, 1982년 이정배·이은선 부부
이정배·이은선은 맞선을 본 지 10개월 만에 결혼했고, 그 뒤 4개월 만에 스위스 바젤대학으로 함께 유학을 떠났다. 바젤대학은 야스퍼스, 니체와 카를 구스타프 융, 카를 바르트 등 종교·인문의 거성들이 있던 전당이다. 프리츠 부리는 아프리카의 성자였던 알베르트 슈바이처와 30년간 편지를 나눴고, 교권주의에 맞선 자유주의 신학의 흐름을 이어 신학의 지평을 동서양의 회통으로까지 확대한 인물이다. 프리츠 부리는 이정배의 스승인 변선환의 지도교수이기도 했다. 변선환·신옥희 교수 부부에겐 불교를 연구케 해 ‘기독교와 불교의 만남’을 이끌게 한 프리츠 부리는 이정배·이은선 부부에겐 동아시아의 정치사회를 이끈 사상인 유교를 연구케 했다. 이에 따라 이정배는 주자학을, 이은선은 ‘페스탈로치와 왕양명’을 연구했다. 남들은 주자학과 양명학을 도긴개긴이라 여길지 모르지만 동아시아에선 상극처럼 생사를 걸고 사상투쟁을 해온 학문이다.
이신의 절친으로 자신의 애제자 이정배와 이신의 딸 이은선이 결혼하도록 주선했던 변선환 교수 & 목사
스위스 바젤대학의 신학자 프리츠 부리교수. 변선환·신옥희 부부에겐 불교를 전공케하고, 이정배·이은선 부부에겐 유교를 연구케한 스승이다.
“학문 논쟁에선 서로 한 치도 양보하지 않지만 우리 부부가 강한 동질감을 느끼는 게 있다. 비주류란 점에서다.” 얼마든지 주류의 영화를 누릴 수 있었음에도 비주류의 삶으로 고난을 자처하는 이신과 변선환 같은 삶은 아무나 살 수 없다. 이은선이 여성신학으로 마초적 남성신학에 도전한 것도, 한 발 나아가 ‘유교적 여성상의 재발견’에 도전한 것도 이신답고 변선환다운 모습이 아닐 수 없다. 그는 ‘(유교적 여성의) 돌봄의 리더십’을 주창했다가 여성학회에서까지 호된 비난을 감수해야 했다. 그럼에도 한나 아렌트가 ‘악의 평범성’을 이야기한 것과 달리 이은선은 동양적 실천력을 우리 몸, 삶 이웃으로 확산시킨 ‘성(聖)의 평범성’을 주창해왔다. 아버지 이신한테서 그리스도를, 독립운동가인 외할아버지한테서 ‘한국적 토착 사상’을 물려받은 ‘그리스도인 이은선’이 여성이란 왼팔과 토착 사상이란 오른팔, 어느 쪽도 포기하지 않은 채 만들어낸 대안 사상이다. 대학교수로서, 두 아이의 엄마로서 고달픈 일상을 감내하면서도 그가 성균관대 동양철학 대학원에서 이동준 교수의 지도로 ‘조선 유교의 종교성’으로 박사학위를 다시 해낸 데서 토착 사상에 대한 그의 집념을 읽을 수 있다.
학문의 경쟁자로, 비주류의 동지애로 살아온 이정배·이은선 부부 신학자
“우리나라 여성들이 깨어나게 하는 데 기독교의 역할이 지대했다. 각자가 하늘과 연결돼 있다는 의식을 강력히 일깨워준 게 기독교다. 그러나 한국 기독교의 타락이 보여주듯, 믿음이 구체적인 삶의 행위로 이어지지 못했다. 인격적 성숙을 통해 머리만이 아니라 몸으로, 정치사회뿐 아니라 의식주 등 생활에서까지 거룩함을 실현하는 유교의 장점이 그리스도의 장점과 통합될 때 희망의 세기를 열 수 있다.”
바젤 인근 도르나흐에서 괴테아눔을 열어 발도르프 교육학, 의학, 치유(특수)교육학, 생명농업의 길을 연 루돌프 슈타이너(1861~1925)가 새로운 정신세계의 출현지로 한국을 주목했듯 이은선도 현장아카데미에서 그런 씨알을 가꾸기 위해 정년을 5년 앞당겨 2년 전 퇴직했다. 극우 기독교도인 트럼프나 중국의 지도자인 시진핑, 양자 어느 쪽에서도 희망을 보기 어렵듯 서구 기독교나 유교의 도그마만을 고집하지 않고, 기독교와 유·불·도가 회통할 수 있다면 양쪽을 경험한 한국이야말로 대안적 정신세계를 만들 최적격지라는 게 그의 생각이다. 이정배도 “‘가난보다 무서운 게 상상력의 부패’라던 장인 이신의 말을 잊을 수 없다”며 상상의 나래를 함께 펼친다.
이들이 들어와 현장아카데미를 세우기 전에 화전민이 살던 집터에서 이정배·이은선 부부가 망중한을 즐기고 있다.
민중신학자보다 더 민중적으로 살았던 이신박사가 소장했던 고서적들을 둔 이신아키브가 이 골짜기 맨윗쪽에 있다. 이신아키브는 이들이 예배를 드리는 공간이기도하다.
“누구든 일주일 정도는 독서와 노동, 기도를 할 수 있는 장소로 만들고 싶다. 시민운동 하는 사람들도 몸과 마음을 쉬고 재충전하는 비빌 언덕이 되도록 하겠다. 또 한 주엔 지적장애아를 둔 열 가정을 초청해 2박3일간 함께 지내며 예배하고, 그다음 주엔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을 읽고 이야기해보고….”
강원도 횡성 산골 현장아카데미에 가면 ‘상상’하며 마치 아이들처럼 달뜨게 도와주는 자연과 책과 사람들이 있다.
횡성/글·사진 조현 종교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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