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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심정 조현이만난사람

욕만하던 스승에게 화가 치솟던 날

등록 2020-05-26 17:58수정 2020-05-27 17:51

대구 비슬산 용연사 주지 능도 스님
대구 달성 비슬산 용연사 주지 능도 스님
대구 달성 비슬산 용연사 주지 능도 스님

대구는 코로나바이러스 사태 초기 확산으로 시민들이 가장 큰 고초를 겪은 곳이다. 따라서 얼어붙은 마음에 따스한 자비와 사랑이 어느 곳보다 필요하다. ‘부처님 오신날’(30일)을 앞두고 지난 20일 대구시 달성군 옥포읍 비슬산 용연사를 찾았다. 대구 지하철 1호선 종점 설화명곡역에서 차로 15분쯤 되는 거리다. 용연사는 부처님도 고난을 피해 온 곳이다. 임진왜란 때 사명대사의 제자 청진 스님이 왜적을 피해 석가모니의 몸에서 나온 진신사리를 경남 양산 통도사에서 금강산으로 모셔 가던 중 1과를 봉안한, 적멸보궁이 있다. 적멸보궁이 있는 곳치고는 널리 알려지지도 않은 곳이다.

산사 초입엔 ‘용연사는 입장료를 받지 않는다’라는 펼침막이 걸려 있다. 3년 반 전 용연사 주지로 부임한 능도(60) 스님은 등산객들과 곧잘 시비가 생기는 문화재 관람료를 받지 않기로 했다. 스님은 “관람료 받는 직원 월급 주고 나면 남는 것도 별로 없으니 안 받기로 한 것뿐”이라고 했다. 공치사 없이 ‘쿨’하다. 그러나 절이 대중과 함께해야 하며 대중에게 봉사해야 한다는 생각은 어제오늘의 것은 아니다. 그가 10년 전 팔공산 동화사 총무를 할 때 낸 두 아이디어는 대구의 명물이 됐다. 하나는 해마다 부처님 오신날을 앞두고 연등 행렬 전 2천개의 풍등을 띄워 소원을 비는 풍등축제인데, 외지인들까지 고대하는 대구의 대표적인 축제가 됐다. 올해는 코로나19로 축제가 취소돼 대구 시민들의 아쉬움이 더욱 크다. 또 하나는 옛 팔공산 일대 스님들의 장터를 재현해 매년 10월 2박 3일간 5만여명이 참가한 가운데 동화사에서 여는 ‘승시’다.

용연사 적멸보궁
용연사 적멸보궁
그런 감각을 가진 그이니 용연사도 변하지 않을 리 없다. 그가 처음 올 때만 해도 허물어지고 낡고 물이 새던 지붕과 담들만 몰라보게 깔끔해진 게 아니다. 능도 스님은 4개월 과정의 불교학당을 1년 과정의 불교대학으로 개편해, 실천 수행과 봉사 체험을 대폭 강화했다.

“요즘은 불자들도 시주금을 냈다고 사용자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내가 돈을 냈으니, 대우받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밥하는 사람은 고용해서 부려먹으면 된다고 여기고, 자기들은 차려놓은 밥을 먹기만 하고 맵네 짜네, 잔소리하는 것을 당연시한다. 그렇다면 그곳은 절이 아니라 레스토랑이다.”

능도 스님은 모든 신도가 함께 식사를 준비하는 등 절 일을 함께하도록 했다. 거의 사찰 밖 출입을 삼가고 마치 머슴처럼 삽을 들고 손수 모든 일을 해내는 그의 모습에 신도들 군소리도 쑥 들어갔다. 절 들머리 쪽에 텃밭을 두고 스님 4명을 비롯해 7명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푸성귀를 직접 가꿔 먹는 그다. 절에 방앗간까지 지어 떡과 수백명분의 밥을 방앗간 기계로 직접 해내 비용을 줄이고, 이곳에서 해낸 떡을 인근 요양원에 돌렸다. 절에서 봉사가 몸에 밴 용연사 신도회도 대구 시내에 노숙자 무료급식소인 ‘자비의 집’에서 함께하고 있다. 앞으로 노후엔 불교공동체를 만들어 여민동락할 꿈을 꾸는 그는 신도들과 함께하는 봉사 속에서 공동체살이를 준비한다. 용연사는 자투리땅에 모조리 국화를 심었다. 능도 스님은 직접 키운 국화차로 신도들을 대접하고, 선물로도 준다.

‘아저리야지시추차담반(我這裏也只是麤茶淡飯), 별무기특사(別無奇特事). 이래저리멱심마(爾來這裏覓甚麽)’(나는 이곳에서 단지 거친 차에 싱거운 밥을 먹고 지낼 뿐/ 무슨 이상하고 특별한 일이 없는데/ 그대는 무엇을 찾겠다고 이곳에 왔는가?)

옛 시와 같은 담백미가 목젖을 타고 스며든다. 이처럼 근면한 삶은 몸에 배지 않으면 흉내 내기 어렵다. 그는 21살에 경남 합천 해인사로 출가했다. 그의 은사는 성철 스님에 이어 해인사 방장과 조계종 종정을 지낸 혜암 스님(1920~2001)이다. ‘공부하다 죽어라’라는 가르침으로 유명한 혜암 스님은 참선 외엔 온종일 노동을 했다. 스승을 따라 노동을 하느라 버텨내지 못하고 상좌들이 도망치기 일쑤였다. 경북 안동에서 태어나고 자란 능도 스님은 스승의 곁에서 그 고된 노동을 감내하면서 무엇보다 스승의 전라도 사투리를 알아들을 수조차 없어 애를 먹었다. 스승은 매사 ‘안동행자’인 그를 “어름한 놈”이라고 욕했다. 신도들이 올 때면 욕이 더 심해졌다. 돌계단을 놓는데, 맞지 않은 돌을 올려놓아도 욕을 했고 잘 맞는 돌을 올려놓아도 욕을 했다. 세무공무원인 부친을 두고 경북 북부의 명문 안동고를 다니며 궂은일이라곤 해본 적 없던 그는 “머슴을 살러 들어온 것도 아닌데, 이렇게까지 해서 중이 되어야 하나”라는 생각에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던 어느 날이었다.

능도 스님의 은사인 조계종 전 종정 혜암 스님
능도 스님의 은사인 조계종 전 종정 혜암 스님
“갑자기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르냐는 생각이 팍 올라왔다. 무릎이 절로 쳐졌다. 내가 옳다고 생각해서 옳지 않다고 생각한 것에 대해 속이 상한 것일 뿐. 내 생각과 맞으면 옳다고 하고, 내 생각과 맞지 않으면 그르다고 할 뿐. 내 생각과 맞으면 어떻고, 틀리면 어떻다는 것인가. 그때부터는 스승이 뭐라든 화가 나지 않았다. 이러라면 이러고, 저러라면 저럴 뿐, 마음도 상하지 않았다. 그러자 스승은 희한하게 더는 욕을 하지 않았다.”

1994년 조계종단 개혁 때 개혁회의 의장을 맡아 개혁의 물꼬를 트는 데 결정적인 계기를 만든 스승의 시자(큰스님을 모시는 사람)로 현장을 지켰던 그는, 이후 사고 사찰로 주지가 몇달 간격으로 바뀌던 경남 합천 연호사에 가 10년간 머물며 절을 안정시켰다. 그 뒤 2004년 경북 고령의 한 농가에 비닐하우스를 지어 노모를 모시고 3년을 살기도 했다. 지금도 종종 그 ‘비닐하우스 토굴’로 가 쉬곤 하는데, 돈도 들지 않는 비닐하우스야말로 극락이라고 말한다.

그는 돈 걱정, 건강 걱정, 자식 걱정에 쉴 틈 없는 불자들에게 “걱정한다고 걱정이 없어지면 걱정이 없겠네”라며 “근심 걱정이란 하면 할수록 끝이 없이 생겨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근심과 걱정과 잔소리가 마침내 습이 되어버려 근심 걱정 잔소리 거리가 없으면 일부러 만들어서 하게 된다”며 “바깥으로 쓸데없는 욕망을 좇아다니지 않으면 내면은 저절로 편안해진다”고 한다. 적멸보궁이 어디인가. 욕망과 근심 걱정이 적멸하니, 보궁(보배로운 집)이 드러난다. 욕망과 근심 걱정이 쉬니, 그대로가 본래면목이다.

달성(대구)/글·사진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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