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성(大成)은 약결(若缺)하나 기용불폐(其用不弊)하고, 대영(大盈)은 약충(若沖)하나 기용불궁(其用不窮)이다. 대직(大直)은 약굴(若屈)하고, 대교(大巧)는 약졸(若拙)하고, 대변(大辯)은 약눌(若訥)하다.
이를 사람에 빗대 해석하자면, ‘큰 성인은 결함이 있는 듯하나 쓸모가 닳지를 않고, 꽉 들어찬 사람은 마치 비어있는 듯하지만 써도 써도 무궁하다. 참으로 바른 사람은 마치 굽은 듯하고, 솜씨 빼어난 장인은 마치 서툰 듯하며, 대웅변가는 마치 어눌한 것 같다’고 볼 수 있다.
도덕경 45장의 이 구절을 읽다보면, 떠오르는 이가 있다. 빈구석으로 가득한 종림 스님(76)이다.
경남 함양군 안의면 무위산 고반재(考般齋)로 종림 스님을 찾았다. 고려대장경연구소장으로 20여년간 대장경 디지털 작업을 마치고 5년 전 그가 낙향하기 위해 지은 곳이다. 명맥은 책박물관 겸 공부방이다. 그가 오랫동안 모은 고서적과 유물들을 전시했으니 책박물관도 맞고, 자주 대처의 지식인들이 찾아와 철학과 인문과 예술을 논하니 공부방도 맞다. 그러나 ‘군자가 고반재간에 있으니 얼마나 즐거운가’라는 <시경>에서 따온 이름 고반재에 맞게 사랑방이 딱 제격인 곳이다.
공양주도 없이 그가 홀로 지내는 경우가 많으니 여느 절집처럼 공양간 밥이 맛난 것도 아니고, 템플스테이 사찰들처럼 서비스가 좋은 사찰인 것도 아닌데도, 서울과 부산, 대구, 창원, 진주 등에서 그를 찾는 손님들이 끊이지않는 것은 ‘종림 할배’가 있기 때문이다. 종림 스님을 아는 이들은 그를 스님이라고 부르기보다는 ‘종림할배’로 부르길 좋아한다. 조계종 해인사로 출가한 스님은 스님인데, 틀에 잡힌 스님같지도 않아서이기도 하고, ‘우리 집에 저런 할아버지 한분쯤 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그런 호칭을 쓰는 이유일 것이다.
1946년 제1회 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자)대회가 열린 아나키스트의 본고장이 바로 이곳 ‘안의’다. 안의출신이라도 다 아나키스트는 아니겠지만, 종림스님은 어떤 조직도 틀도 사상에도 사로잡히지 않기에 너무도 아나키스트답다. 바랑하나 매고 구름처럼 떠도는 운수납자이자 무위산의 무위자연의 도인이자 어느 것에도 매이지않는 자유인이면서도, 온갖 새들이 깃들고 싶어하는 넓은 품을 지닌 할배가 바로 그다.
그가 최근 <空에 대한 단상들>(만인사 펴냄)이란 책을 냈다. 불과 140여쪽의 작은 책 중간중간에 만인사 출판사 대표인 박진형 시인의 시가 담기고, 서예 분야에서 한 도를 하는 일사 석용진선생의 붓그림이 그려져 있으니, 종림 스님이 쓴 글이랬자 100여쪽 정도다.
“나이가 들었나.
치닫기만 하다가 돌아보는 시간이 되었으니
밥값은 한 걸까. 하나의 선을 그었으니
공집합이라는 장에
대각선, 소실점이라는 점을 찍었으니
어떤 그림을 그릴 수 있을까.
무한까지 이를 수 있을까.
선은 어떤 소리를 낼 수 있을까.
하늘에서 울려오는 소리일까.
아니면 이매망량의 웅얼거림 정도일까.
아무튼 무대가 주어졌으니
노래 따라 춤을 춰야지.
어떻게 움직일까.
산다는 것....”
<空에 대한 단상들>은 이렇게 시작된다. 마치 시같기도 하고, 깊은 달밤에 혼잣말인것도 같다. 그러니 단상들일테지만, 폭과 깊이에서 단상일 수가 없다.
“1에서 시작하지 말고 0에서 시작해라.
1에서 시작한다면 살아도 죽은 송장이다.
0에서 시작한다면 1도 살고, 2도 살고, 3도 산다.
01, 02, 03......”
출가하기 전에 그가 마지막 본 책이 사르트르의 <존재와 무>였다고 한다. 출가 뒤 유와 무를 갖고 씨름하던 그는 네팔의 포카라에 머물며, 불현듯 0을 생각했다. 왜였을까.
“나는 나 자신을 신의 실패작이라고 생각했다. 세상에 맞는 구석이 하나도 없는…”
그는 자신을 이렇게 표현했다. 다른 곳에선 자신을 더 내쳤다.
“역에 유혼(遊魂)이란 놈이 있다.
유혼은 말 그대로 떠도는 혼이라는 이야기다.
떠도는 유랑자, 소속도 없고 정착도 하지 못한 놈이다.
뭔가 있기는 있는 것 같은데 실체도 알 수 없고,
이름도 알 수 없는 놈이다.
1의 입장에서 본다면 기존의 질서를 흔들고 파괴할 수도 있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위험한 놈이다. 기존의 질서나 틀에서 본다면
위험한 불청객이다.”
언듯언듯 나온 고백록이 말해주듯 그는 0으로서 자신을 에워싸고 있던 모든 것들을 무화시켜버리고싶었지 모른다. 아니 그의 허허로운 풍모는 이미 무화에 이르거나 가까이 가 있음을 말해준다.
‘하고 싶은 일들 중의 하나, 만일 공의 입장이 있다면, 나를 공의 위치에 두고 세계를 쳐다보고 세계와 사건을 해석해보는 것이었다.’
동국대 인도철학과에 들어가기 전부터 남산도서관에 틀어박혀 온갖 책을 섭렵했다는 그는 보기와는 완연히 다른 다독가다. 그림자를 새기지않은 강물처럼 부드럽고 비어있는 그의 어디에 그런 박람강기(博覽强記·널리 읽고 잘 기억함)가 숨어있는 것일까.
부처와 피타고라스와 용수보살을 거쳐 들뢰즈와 바디우와 라캉까지 여행하면서, 그는 들뢰즈가 무한을 건드렸다면, 바디우는 0을 문제삼았다고 해석했다. 그래서 들뢰주를 현대판 장자로, 바디우의 공집합은 용수의 중론적인 공의 후예라는 것이다.
그가 고백하듯 세상 어디에도 맞지도 않고 적응하지도 못하는 자신에 대한 절망과 갈등으로 출가 이후까지 고뇌하던 그도 불교적 수행으로 이를 극복하려 붙잡고 매달려 수행에 매진했던 적도 있었다. 그러나 도무지 자신을 어디에 두어야할지 알 수 없어 갈등은 커져만 갔다. 그러다가 선방에서 자신을 사막 한 가운데 두게 됐다고 한다.
“사막의 한가운데는 해도 없고 달도 없다.
산도 없고 나무도 없다.
길은 물론이고 집도 사람도 없다. 동서남북도 없다. 아무것도 없다. 아무것도 아니다. 아!”
그 전엔 붙잡고 있던 관념과 이념들들이 부딪혀 바닥이 고르지않아 바로 설수가 없었는데 그 때부터 이제 어느 자리나 설 자신이 생겼다고 한다. 고른 자리면 고른 자리대로, 고르지못한 자리면 그 자리대로 아무데라도 자신을 세워도, 애초에 좋아하던 곳이 아닌 자리에 서더라도 그때부터는 크게 문제 될게 없어졌다는 것이다. 해방이다.
그 뒤 그는 이념이나 종교나 자기세계에 갇혀 있는 사람에게도 0(공)을 실어다주었다. 말보다 텅 빈 그의 아우라가 전해주는게 0이었다. 1의 관점, 2의 관점, 3의 관점을 가지며 다투던 사람들도 그의 공집합 속에 녹아서 해방을 경험했다. 그래서 마침내 1도, 2도, 3도 살아났다.
고반재에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오지만 그는 잘해줄려고 하지않는다. 의도적으로 잘해주는데는 목적이 있게 마련이고, 목적을 가지면 바라는 마음을 갖게 되고, 이것을 들어주지않으면 상대에게 실망하게 마련이다. 그는 굳이 찾아오는 이에게 다만 편히 맞아줄뿐이니 잘해줄려고 애쓰지않는다. 그것이 ‘종림할배’의 0식 맞이고, 그래서 많은 이들이 기대 없이 종림 할배를 찾는 이유이기도 하다.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