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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아빠도 아픔이 있고, 사랑이 있었다네

등록 2022-03-14 12:21수정 2022-03-14 16:10

사진 픽사베이
사진 픽사베이

‘좋은 아빠, 싫은 아빠, 슬픈 아빠/ 좋은 엄마, 싫은 엄마, 슬픈 엄마’( ‘아빠의 눈물’ 중 한 구절)

나는 아버지로서 그 역할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 단 한 번도 아이들을 안아 주지 않았으며 인형이나 장난감은 물론 신발이나 옷 하나 제대로 사 준 적이 없었다. 그래도 아이들이 크면 이해해 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아직도 우리 아버지의 무뚝뚝함을 이해하지 못하듯이 우리 아이들도 나의 무뚝뚝함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서 아이들한테 미안하다. 형식적인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이제 와 생각하니 형식적인 사랑이라도 해야 했지 않았나 싶다. 한편으론 부모가 아이들한테 형식적인 사랑을 하면 아이들도 부모한테 형식적인 사랑을 하지 않을까 걱정이 되기도 하였다. 어린이날 아이들한테 뭔가를 보여 줘야 하는 부모들이 괜한 고생을 하는 것 같고 어버이날에 꽃을 달아 주는 아이들도 괜한 고생을 하는 것 같아서 씁쓸하다. 평소에 아이들을 사랑하고 어버이를 섬기면 될 일인데 날을 정해 놓고 사랑을 드러내야 하니 무언가 강요받는 느낌이 든다. 그럴 바엔 차라리 생일을 기억하는 것이 더 좋지 않을까 싶다. 어린이날, 어버이날, 스승의 날을 기억할 것이 아니라 생일날에 진심 어린 사랑을 담아 조그만 선물이라도 하는 것이….

우리 동네에 거의 날마다 얻어맞고 사는 아저씨가 있었다. 아저씨는 늘 훈장을 달고 다녔는데, 그 훈장이라는 것이 왼쪽 광대뼈에 붙어있는 상처를 말하는 것이었다. 언제 생긴 건지는 모르겠으나 딱지가 거의 다 떨어질 무렵이면 또 그 자리에 상처가 생겨 무슨 문신처럼 보이기도 하였다. 하루는 아저씨가 집 마당에 있는 평상에서 자고 있는데 아주머니가 큰 빗자루를 들고 와서는 고래고래 악을 쓰며 패대는데 나는 그 광경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저씨는 얻어맞으면서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은 것이다. 아저씨는 왜 저렇게 얻어맞기만 하는 것일까? 그런 아저씨가 불쌍하게 보였지만 한편으로는 가족에게 너무 무책임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 집 사정을 자세히 알 수는 없으나 아주머니가 아저씨를 미워하는 것은 아저씨가 날마다 술에 취해 있기 때문이었다. 동네 아주머니들도 처음에는 매 맞는 아저씨를 동정했지만 이제는 아주머니를 이해하게 되었다. 나도 아저씨가 날마다 술을 마시는 이유를 통 알 수가 없었다. 다행히 초등학교 3학년 딸아이는 아버지를 미워하지 않았다.

어느 일요일 오후, 아저씨와 나는 동네 뒷동산에 가서 소주를 마셨다. 아저씨는 소풍 온 아이처럼 즐거워했다. 아저씨가 술을 마시는 까닭은 알코올중독 때문이기도 했지만, 자학 때문이기도 하였다. 스스로 말하기를 자기는 시인이고 나이는 이백살이라고 하였다. 시 한 수 읊어달라고 하니 지금까지 지은 시가 하나도 없다며 킬킬 웃었다. 그 모습이 어찌나 천진스러운지 나도 따라서 웃었다. 아저씨는 바짝 마르고 왜소해 보였지만 눈은 아이처럼 맑았다.

하루는 즐거운 모습으로 눈사람을 만들고 있는 아저씨를 보았다. 웬일이냐고 물으니 내일 딸아이 생일인데 마침 눈이 내려서 눈사람을 만드는 거라고 하였다. 나는 그 모습을 보고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모른다. 나는 내 아이들을 위해서 한 일이 아무것도 없었던 것이다.

사진 픽사베이
사진 픽사베이

그러던 어느 날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아저씨가 취직을 하게 된 것이다. 양복 입은 아저씨는 사뭇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아이가 학교에서 돌아올 시간에 아저씨는 출근을 했다. 출근할 때마다 아이한테 잘 다녀오겠다고 인사를 했다. 아저씨는 출근길에 한 번 퇴근길에 한 번 우리 약방에 들려서 드링크제와 간장약을 사 먹었다. 출근은 오후 서너시쯤 하고 퇴근은 거의 자정쯤 하는데 늘 우리 약방 마지막 손님이었다. 한번은 목욕탕에서 아저씨를 만났다. 아저씨는 날마다 목욕탕에 온다고 하였다. 그래서 그런지 출근할 땐 언제나 탱탱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퇴근할 땐 언제나 바람 빠진 풍선이 되었던 아저씨! 하루는 어느 직장에 다니느냐고 물어보았더니 좋은 직장에 다닌다는 말만 하였다. 직업에 귀천이 없다고 했는데 정말 그럴까? 너의 아버지는 무슨 일을 하느냐, 너는 무슨 일을 하느냐? 그렇게 물어보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은 세상이다.

아저씨네 집이 이사를 했다. 그래도 아저씨는 날마다 우리 약방에 들렸다. 그런데 얼마 뒤부터 아저씨가 보이지 않았다. 이사 간 동네의 약국을 이용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개나리가 보이고 진달래가 보이던 어느 봄날에 아저씨가 간암으로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리고 알게 되었다. 아저씨의 직업이 술 상무였다는 것을.

‘그까짓 인형 없어도 좋아/ 아빠의 마음 나는 알아요/ 새벽꿈 옆에 서 있는 아빠/ 나는 알지요 아빠의 마음

저 푸른 하늘 푸른 하늘에/ 검은 구름이 생겨났어요/ 술 취한 아빠 우리 아빠가/ 오늘은 왠지 슬퍼 보여요

내일은 우리 집이 이사를 간다/ 지금보다 작은 집으로 가지만/ 그래도 난 우리 아빠가 좋다/ 아빠, 사랑해요

푸르른 들판 드높은 하늘/ 아빠랑 같이 뛰놀고 싶어/ 용감한 아빠 그리운 아빠/ 나는 알아요 아빠의 눈물’ (‘아빠의 눈물’·1990·처음 제목은 ‘슬픈 우리 아빠’)

글 한돌(<홀로아리랑>, <개똥벌레> 등 작사 작곡가·음악가·작가)

*이 시리즈는 순천사랑어린학교장 김민해 목사가 발간하는 <월간 풍경소리>와 함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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