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생화(野生花)라고 하면 왠지 무겁고 학자의 말투처럼 들리고 들에 사는 꽃이라고 하면 가볍고 포근하게 들린다. 야생초(野生草)와 들에 나는 풀도 마찬가지다. 똑같은 것을 표현해도 중국 글자와 우리 글자는 느낌이 확연히 다르다. 그런데도 여전히 한자 상용이 잦다. 야생화와 들꽃, 야생초와 들풀 그대는 어느 쪽 말을 택할 것인가? 한자를 쓰지 말자는 게 아니라 굳이 한자로 표현하지 않아도 되는 말은 한글을 쓰자는 게 내 생각이다.
이제 와 돌이켜 보면 겉멋 인생은 아무 쓰잘머리 없는 짓이었다. 나라가 하는 일을 봐도 쓰잘머리 없는 일을 많이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멀쩡한 보도블록 갈아치우는 것도 그렇고, 일 제대로 하지 않고 온갖 혜택 다 누리는 국회의원도 그렇고, 거둔 세금 펑펑 새 나가는 것도 그렇다. 옛날에는 얼굴이 잘생긴 사람이 배우 하고 목소리 좋은 사람이 성우하고 가수하고 그랬다. 요즘엔 그래도 많이 나아져서 얼굴이 못생겨도 배우 할 수 있고 목소리가 좋지 않아도 가수 할 수 있다. 우리는 그동안 얼굴 잘생기고 목소리 좋은 사람만 찾다가 정말 훌륭한 배우와 가수를 놓쳐 버렸는지 모른다. 잘난 꽃 못난 꽃이 어디 있겠냐만은 향기 좋은 꽃만 기억하고 있는 나를 보더라도 빛 좋은 개살구로 살아온 것 같다. 들에 살았으면서도 들꽃을 모르니 말이다. 사람들은 예뻐 보이려고 화장품을 바른다. 그것도 부족하다 싶으면 향수를 뿌린다. 사람들 대부분이 그러하다 보니 언제부턴가 사람 냄새가 사라져 사람이 그리운 세상이 되었다. 사람은 마음에서 향이 나야 하는데 몸에다 향수를 뿌리고 있으니 글 향 없는 책과 다를 바 없다.
다움은 없고 모방이 판을 치는 세상이다. 백만장 이상 팔린 음반을 대단하게 생각하고 천만 관객을 동원한 영화를 대단하게 생각한다. 우리는 어느새 자신도 모르는 숫자놀음을 하고 있다. 향기 없는 꽃들이라도 군락을 이루면 사진작가들이 모여들고 길 잃은 철새는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는다. 산이 아프고 강이 아픈데도 사람들은 그저 세상이 변했다고만 한다. 사람들이 제아무리 행패를 부려도 자연은 변하지 않는다. 척 예술 뒤에 숨은 사람과 그것에 물든 사람들이 말한다. 세상은 변했다고, 변해야 한다고. 그게 사람이 변한 거지 세상이 변한 게 아니지 않는가. 들꽃을 함부로 밟고 눈길을 주지 않아도 들꽃은 변함없이 사람들을 행복하게 한다. 예전엔 나도 그랬다. 늦었지만 이제는 들꽃을 존중하며 하나둘 사귀고 있다. 향기 없는 꽃은 지나쳐버리고 향기 있는 꽃은 아는 척했던 지난날의 내 모습이 참으로 밉다. 산이 아름다운 건 아주 작은 들꽃이 있기 때문이라는 걸 뒤늦게 깨닫는다. 26살 때 집을 나와 떠돌이 생활을 좀 했다. 찌든 도시 생활에서 벗어나 시골 가서 밭 일구며 살고 싶었는데 뜻을 이루지 못했다.
가끔 순천에 가면 만나는 사람들이 있는데 만나는 사람 모두가 들꽃이다. 그 들꽃들은 단 한 번도 예쁜 척 한 적이 없다. 그러니까 꽃병에 꽂힌 꽃도 아니고 잘 가꿔진 정원에 핀 꽃도 아니고 그냥 들에 핀 평화로운 꽃들이다. 내가 다른 들꽃 이름은 잘 몰라도 앵무산 기슭에 피어있는 들꽃 이름은 거의 다 외운다. 나마스테꽃, 노라꽃, 다정이꽃, 댕댕이꽃, 동백이꽃, 두더지꽃, 무무꽃, 무심꽃, 무지개꽃, 민들레꽃, 반디불이꽃, 보리밥꽃, 빛바람꽃, 소리샘꽃, 은가비소정꽃, 신난다꽃, 언연꽃, 원담꽃, 함박꽃, 향아꽃, 현동꽃, 혜리꽃 등 여러 꽃이 평화롭게 어우러져 있다. 혹시 내가 까먹은 이름이 있다 하더라도 그 꽃들은 서운해하거나 삐지지 않으리라. (이름을 까먹은 꽃은 나중에 짜장면 한 그릇 약속함.)
버려진 학교에 들꽃이 날아들어 거친 땅을 갈아 비옥한 땅을 만드니 학교가 숨을 쉬고 뒷산도 덩달아 되살아나 흘러가는 구름도 웃고 넓은 저 들판도 웃고 평화가 스며들었다. 들에 펴서 들꽃이 아니라 들을 지켜서 들꽃이로다. 행복이라는 게 대단한 게 아니다. 그저 하루하루 평화로우면 그만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는 것도 행복이겠지만 그보다는 근심 걱정을 다스릴 줄 아는 게 더 큰 행복이겠다. 행복은 낮은 곳에 있으므로 높이 올라갈수록 멀어진다. 하지만 근심 걱정이 있으면 행복이 잘 보이지 않으니 그걸 잘 다스리면 하루하루 행복을 곁에 둘 수 있다. 행복의 화룡점정은 맞울림(共鳴)이다. 내가 노래를 하면 내 눈에 보이는 것들도 나와 같은 노래를 한다. 내가 행복할 때 나뭇잎이 살랑살랑 춤추면 나도 행복하고 나뭇잎도 행복한 것이니 바로 그런 것이 맞울림이다. 꽃이 시들었는데 나 혼자 기쁘면 그건 행복이 아니라 도취다. 들꽃은 부잣집 정원에도 있고 임금님이 사는 궁궐에도 있다. 도취에 빠지지 않고 내 눈에 보이는 것들을 즐겁게 해주는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행복이 아닐까? 집도 즐겁게 해주고 사람도 즐겁게 해주고 벌, 나비, 나무들까지도 즐겁게 해주는 들꽃! 꽃들의 속삭임이 들리는 들길을 걸으며 오늘도 나는 행복했네.
깊은 산 속에 산다고 자연인은 아니지. 마음만 먹으면 도시에서도 자연인으로 살 수 있다. 들꽃이 도시에서 살지 못하면 들꽃이 아니고 자연인이 도시에서 살지 못하면 자연인이 아니다. 사람들은 향기 좋은 꽃들은 잘 알면서 들에 핀 꽃들은 잘 모른다. 그래도 들꽃은 서운하다 말하지 않는다. 사람이 들꽃으로 산다는 것, 그건 행운이다. 비록 눈에 잘 띄지는 않지만 언제든지 모든 사람을 행복하게 해줄 수 있기 때문이다. 순천에 사는 들꽃들을 만나면 나도 덩달아 들꽃이 된 것 같아 기분이 좋다. 누군가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다는 것, 이 어찌 기쁘지 아니한가!
부는 저 바람은 어디로 갈까
그리운 님을 찾아서 헤매는 걸까
장미 화원에는 향기가 넘쳐
벌들이 찾아와서 사랑을 속삭이네
아 장미는 아름답지만
거친 저 들판에 가난한 꽃들은
장미보다 아름다워 내가 나비라면
들에 핀 저 꽃들에게 머무르겠네
-‘들에 핀 꽃’, 1980
글 한돌(작사작곡가·가수)
*이 시리즈는 순천 사랑어린배움터 마루 김민해 목사가 발간하는 <월간 풍경소리>와 함께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