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위선자입니다. 스승 역할을 하지만 스승의 고통을 안고 있습니다. 용서하라고 하면서 용서를 못 하고, 화내지 말라고 하면서 화를 냅니다. 스님은 스님의 고통이 있습니다. 성직자라는 게 위선자라는 것입니다.
의사는 의사의 고통이, 지도자는 지도자의 고통이, 주부는 주부의 고통이, 수행자는 수행자의 고통이 있습니다. 누구에게도 삶은 쉽지 않습니다. 누구나 포기하고 싶을 때가 있고 다 버리고 떠나 버리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해피스님이라는 분이 계시다고 들었는데 저는 해피스님이 아니라 회피스님인 거 같아요. 마음의 어려움은 알아차리기 어렵지만 피하는 것은 많이 익숙해져서 쉽습니다. 모든 어려움을 마음 구석 안 보이는 곳에 숨겨 놓습니다.
마음의 어려움을 해결하는 것이 수행이라는 것을 모르고 다른 데 가서 수행을 찾습니다. 절에 가서 108배 하고 집중수행 가서 명상합니다. 아니면 아픔을 안 느끼려고 여흥을 취하거나 감각적인 즐거움에 빠집니다. 하지만 기본적인 불안은 커집니다. 사람들 만나고 영화도 보러 가고 바쁘게 지냅니다. 알게 모르게 기본적인 불안과 슬픔을 안 느끼려고 온갖 전략을 실행합니다.
기본적인 불안과 슬픔이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고(苦), 산스크리트어로 ‘두카’입니다. 수다 떨 때 영화 볼 때 법회 참석할 때는 두카를 느끼지 못합니다.
모든 아픔과 두려움으로부터 도망쳐 보지만 그것은 늘 우리를 따라다닙니다. 조용한 외로움 속에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작은 가시처럼 늘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하지만 두카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수행이 있습니다.
우리의 수행은 사랑입니다. 사랑은 집착하는 것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우리의 수행은 용기입니다. 용기는 직면하기 어려운 것을 직면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수행은 용서입니다. 미운 사람을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을 찾는 것입니다.
우리의 수행은 알아차림입니다. 알아차림은 자신의 약하고 어두운 면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인정하면 놓아집니다. 정화가 일어납니다. 인정이 깊을수록 정화도 깊습니다. 인정이 불교에서 말하는 참회입니다.
108배와 좌선이 수행이 아닙니다. ‘이 뭐꼬’가 화두가 아닙니다. 싫은 것을 직면하고 어려운 것을 하고 두려운 것을 파고 들어가고 집착하는 것을 놓는 것이 우리의 수행이며 화두입니다.
알아차림은 인정, 인정은 내려놓는 것, 내려놓는 것이 하심입니다. 여기에 정화와 성장이 있습니다.
고통과 두려움을 알아차리고 직면하면 생각보다 아프고 두렵지 않습니다. 아프고 두려운 이유는 무시하고 외면해서, 안 보려고 해서 아프고 두려운 것입니다. 직면하면 아픔이 지나가고 실상을 알아차리게 됩니다. 사실 고통은 허깨비입니다. 실체가 없습니다. 직면만 하면 아무것도 아닌 것을 알게 됩니다.
해결하지 못한 마음의 모든 어려움이 이생의 숙제일 수 있습니다. 이걸 확인하게 되면 천천히 쉬어 가면서 조금씩 조금씩 용기를 가져 볼 수 있어요. 저도 여러분도 할 수 있습니다. 진정한 행복은 우리의 권리이며 이생에 가질 수 있고 가져야 하고 가질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