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가려워서 긁는다고 하지만 사실은 긁어서 가려운 거라는 얘기를 장황하게 늘어놓다가 꿈에서 깨어난다. 이 얘기를 누구에게 왜 했는지는 물론 기억에서 지워졌다. 가장 잘 하는 행위는 하지 않는 것이다. 가장 잘 다스리는 것은 다스리지 않는 것이다(老子). 하늘이 하늘인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서다. 그러나 하늘이 없으면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 꿈에서 깨어나는데 어디 한 번 시험해보라는 듯, 허벅지가 몹시 가렵다. 한두 번 긁다가 멈추고 가려움을 그냥 거기 있게 놔둔다. (세상에 가려워서 죽은 사람 없으렷다.) 그러다가 다시 잠들었나보다. 잠 깨어 일어나보니 허벅지 가려움이 씻은 듯 사라졌다. 잠결에 계속 긁었으면 또 어디 살갗이 벗겨지거나 아니면 핏발이 서기라도 했겠지.
-누가 누구를 본받는다는 게 무엇을 어떻게 하는 것인가? 이 ‘질문’ 앞에서 보이는 건 아무의 집 신축 공사장이다. 땅을 깊이 파고 집을 앉히는데 문마다 문지방이 없다. 꿈속에서, 누구를 본받는 것과 문지방 없는 문이 무슨 상관인가? 의아해하다가 다른 꿈으로 넘어간다. 그런데 다른 꿈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잠에서 깨어날 때 문지방 없는 문만 남아있다. 보기 드문 일이다. 먼저 꿈을 단어 하나라도 적어두지 않으면 나중 꿈에 묻혀 기억나지 않는 것이 보통인데 이번은 초저녁 꿈이 새벽꿈을 젖히고 두렷하게 남아있다. 아울러, 그 의미가 보름달처럼 떠오른다. 문은 있되 문틀은 없다. 뜻은 있되 그것을 담는 꼴은 없다. 네가 누구를 본받는 것은 눈에 보이는 그의 겉모습을 시늉하는 게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그의 얼을 네 얼로 삼는 것이다.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 뜻을 저한테서 이루어주십시오.” 이 기도 하나로 사는 것이 예수를 본받는 길이다. 그 길을 오롯이 걸어라. 네가 다른 이름의 예수로 살게 될 것이다. 아멘. 잊지 않겠습니다, 오늘도 저에게 허락된 것은 아버지께서 제 몸으로 사시는 오늘 하루뿐입니다. 저는 없습니다. 아무데도 없습니다. 예, 제가 여기 있습니다.
-나는 본다, 내가 걷고 있는 것을. 나는 듣는다, 내가 하는 말을. 난초꽃이 피었구나. 향 한번 맡아보자. 내 코가 난초에 닿는다. 향이 온몸에 스며든다. 저쪽에서 목마른 너구리가 쳐다본다. 그가 말한다. 목마르다. 물 좀 마시게 해다오. 두 손으로 개울물을 떠서 너구리 입술에 대어준다. 너구리가 혀로 물을 찍어 마시고 유리 같은 눈으로 쳐다보며 말한다, 네 손을 쓸 수 있게 해줘서 고맙다, 내가 살았다. …이런 내용의 말을 귀로 들었는지 눈으로 읽었는지 아니면 누구에게 해줬는지 그건 모르겠다. 같은 말(글)이 두세 번 반복된 것 같다. 어느새 꿈밖으로 나와 있다. 엊그제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해준 말이 생각난다. “너희 몸을 남들이 함부로 쓰게 놔두지 마라. 너희가 너희 몸을 쓰는 방법은 두 가지밖에 없다. 하나는 스스로 자기를 위하여 쓰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너희 몸이 필요한 누구에게 억지로나 무서워서가 아니라 스스로 기꺼이 내어주는 것이다. 너희는 로봇도 꼭두각시도 아니다. 한님의 자녀들이다. 아버지 어머니를 욕되게 하지 마라. 사람으로 살아라.”
이현주 목사가 전남 순천사랑어린학교에서 어른이공동체원들과 함께 마음 나누기를 하고 있다. 사진 순천사랑어린학교 제공.
-꿈에서 스토리마저 사라지는가? 누가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혹은 듣는 말인지 알 수 없는 ‘말씀’만 남는다. “생각과 말로 먹는 떡국은 그것이 몸으로 먹는 떡국에 동화(同化)될 때 마침내 떡국이다. 그러기까지는 아직 떡국이 아니다. 말씀은 그것이 몸으로 실현될 때 비로소 말씀이다. 그러기 전에는 아직 말씀이 아니다. 잊지 마라, 너는 몸으로 실현된 한님의 말씀이다. 있는 건 네가 아니라 너 없으면 세상에 있을 수 없는 한님의 말씀이다…”
-교회당 제단 옆 기도실 같은 데서 불을 피운다. 무슨 일로 밖에 나갔다가 돌아오니 사람들이 웅성거리고 분위기가 심상찮다. 집사람이 부엌에 있는데 곁에서 지능이 모자란다고 소문난 마리아가 제단, 제단, 하고 중얼거려 달려가 보니 기도실 천장에 불이 막 붙더란다. 가까스로 불은 껐지만 천장에 그을음이 남아있다. 아차, 내가 불 피운 걸 까맣게 잊고 있었구나, 뉘우쳐도 일은 이미 저질러진 뒤다. 그런데 사람들 눈빛이 일그러지고 사납다. 말은 하지 않아도 이 모두가 당신 탓이라는 거다. 방금 전까지 목사님, 우리 목사님, 하며 얼씬거리던 여자들도 매몰차게 고개를 돌린다. 천상천하에 나 홀로 비참하구나, 생각이 든다. 실수로 불이 날 번했지만 불이 난 것도 아닌데, 기도실 천정이 약간 그을었을 뿐인데, 이토록 싸늘하게 돌아서다니, 이것이 인심이라는 건가? 누가 뒤에서 속삭인다, 그러니 정신 차려라. 자칫 방심하면 교회당을 교회에 우선(優先)하는 우(愚)를 범할 수 있다. 교회당은 눈에 보이고 교회는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교회가 있어서 교회당이 있는 거다. 거꾸로는 아니다. 이 순서를 일상 속에서 잊지 마라. 순서(順序, order)가 천명(天命, the Order)이다.
글 아무개 이현주 목사/전남 순천사랑어린학교 마음공부 선생님
***이 시리즈는 순천사랑어린학교장 김민해 목사가 발간하는 <월간 풍경소리>와 함께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