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는 꼭 내 뒤에서 나를 끌어안으며 “만세가 너무 좋아”라고 말한다.
내 이름은 만세. 육아하는 고양이다.
인간의 능력 대부분이 고양이보다 보잘것없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가끔 하나 부러운 능력이 있다. 그들의 언어.
눈치 없는 반려인들과 살다 보면 분통이 터질 때가 있다. 이들은 왜 말귀를 못 알아들을까. 밥 달라고 하면 놀아주고, 놀아달라고 하면 밥을 주는, 제멋대로 생각하는 인간들. 타는 목마름으로 인간의 언어를 배우고 싶다 생각한 적이 여러 번 있었다.
아이가 말을 하기 시작하면 육아는 새 전기를 맞는다. 말을 하기 전에는 얼른 말을 깨쳐서 제 뜻을 제대로 전달했으면 좋겠다 싶은데, 한 치 앞도 모르는 생각이다. 끝없이 말하는 아이는 한층 ‘업그레이드’된 떼를 쓰고, 요구하고, 잔소리를 한다. 황당한 말에 웃음을 터뜨릴 때도 있지만 가끔은 입을 막아버리고 싶을 때도 있다.
내가 키우는 아이는 20개월 무렵 문장을 만들기 시작했다. 아이가 처음 만든 문장은 “아빠, ‘에취’ 했네”였다. 재채기하는 아빠를 보며 아이는 뿌듯한 듯 환하게 웃었다. 아이의 말은 계단처럼 뛰어올랐다. 어느 날 아침에는 자기가 방귀를 뀌고는 옆에 앉아 있는 나에게 뒤집어씌웠다. “야옹이, 뿡 했네?” 의문의 1패. 억울한 이 마음. 이래서 인간의 말을 배우고 싶다는 것이었다.
두 돌이 갓 지난 여름, 커피 사마시기 좋아하는 부모의 취향을 파악하고는 제가 밖에 나가고 싶으면 “커피 마시러 갈까?” 권유형 문장을 썼다. 계단을 내려가며 “엄마, 조심해!” 경고도 날렸다.
세 돌이 되자 말로 동화를 쓰는 경지에 올랐다. 하늘이 맑았던 어느 날 오후, 뽀얀 낮달이 떠 있는 것을 보고 아이가 엄마에게 물었다. “왜 달님이 벌써 나왔지?” 아이 엄마는 “글쎄, 왜 이렇게 일찍 나왔을까?”라고 대답했다. 아이는 달님 같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내가 보고 싶어서 빨리 나왔나 봐.”
아이가 장난감을 가지고 놀며 이야기를 하고 있다. 늘 아이의 말을 경청하는 나.
무럭무럭 자란 아이의 말은 때때로 어른을 반성하게 했다. 어느 날 아침, 반려인은 출근과 아이 등원 준비를 동시에 하며 정신없이 채비를 하던 중이었다. 평소 집 안에 낙서하지 않던 아이는 그날따라 바닥에 크레파스를 주욱 그었다. 반려인은 처음이니 그럴 수도 있지 하며 물티슈로 바닥을 훔쳤다. 아이는 그날따라 엄마를 기다리는 게 지루했던 걸까. 막 갈아입은 옷에도 그림을 그렸다. 반려인이 한숨을 쉬며 옷을 갈아입혔다. 아이는 처음 해본 놀이가 재미있었던 모양이다. 새 옷에 같은 행동을 반복했다. 분노 열매를 먹은 반려인이 결국 목소리를 높였다.
캣타워에서 내려다보고 있던 나는 그가 현관문을 나서자마자 소리 지른 것을 후회할 것이라 예상했다. 아니나 다를까, 반려인은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아이에게 말했다. “엄마가 아까 화내서 미안해. 바쁜데 자꾸 낙서해서 옷을 갈아입어야 하니 마음이 급해서 그랬어.” 그러자 아이가 말했다. “괜찮아, 엄마. 그런데 소리는 지르지 마. 그러면 엄마 목이 아프잖아.” 늘 그렇지만 이렇게, 어른이 아이보다 못하다.
순수하고 아름다운 아이의 말을 오래오래 곁에서 듣고 싶다. 내 몸에 제 얼굴을 폭 기대며, “만세가 좋아, 너무 좋아”라고 쏟아내는 고백도.
만세/전업육아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