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과 일상을 보내는 것이 익숙한 아이는 우리에 갇혀 있는 동물원 동물들을 보고 온 날 충격에 빠진 듯했다.
어느 주말, 반려인들과 아이가 동물원에 다녀왔다. 동물원에 가기 전 아이는 한참 들떠 있었다. 반려인들은 아이를 동물원에 데려가는 걸 내키지 않아 했다. 그런데 주말마다 “엄마, 어제 은현이가 커다란 코끼리를 보고 왔대. 나도 보고 싶다”라고 말하는 아이의 성화에 결국 집을 나섰다.
한낮에 나가 밤이 한참 깊어 돌아온 아이는 어쩐지 좀 시무룩해 보였다. 더 놀고 싶었는데 못 놀고 온 건가, 아님 너무 신나게 놀아서 지친 건가. 집에 돌아오자마자 거실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서는 양말을 한 짝씩 벗고 있는 아이에게 가서 얼굴을 비볐다. 양말을 다 벗은 아이가 내 등에 얼굴을 가만히 기대고는 말했다. “만세야, 오늘 동물원에 가서 곰돌이를 봤는데, 곰돌이는 엄마가 보고 싶은가봐.”
40개월을 넘긴 아이는 이제 다른 사람의 감정을 공감할 줄 안다. 슬픔이란 것을 모르던 천진난만했던 아이는 이제 전래동화 <청개구리>에서 청개구리 엄마가 아이를 지키느라 뱀에 물려 죽는 장면에서 대성통곡을 하는 아이가 됐다. 아이는 동물원에서 혼란스런 감정을 느끼고 온 듯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아이가 벗어 던져둔 양말을 주워 담으며 이런저런 말을 나누는 반려인들의 얘기를 들어보니 대충 상황이 그려졌다. 동물원에 도착해 아이가 처음 본 동물이 커다란 곰이었다. 곰은 우리의 이 끝에서 저 끝으로 쉬지 않고 움직이고 있었다. 동화책에 나오는 커다랗고 듬직한 곰은 없었다. 아이 옆에 선 다른 관람객이 혀를 차며 말했다. “어쩜, 쟤는 볼 때마다 저러고 있네.”
상상했던 동물을 만나지 못하고 돌아온 아이가 안쓰러웠다. 그날 나는 아이가 잘 때 평소보다 더 꼭 붙어서 잤다.
동물원에서 아이는 그 어떤 동물을 보고도 놀라거나 기뻐하지 않았다. 다만 어리둥절해하고, 조금 무서워했다. 그림책과 텔레비전 화면에서 본 야생의 풍광을 배경으로 멋지게 움직이는 동물은 어디에도 없었다. 아이는 물었다. “아빠, 치타는 자동차보다 빠르지 않아? 그런데 왜 움직이지 않지?” “엄마, 곰돌이는 왜 자꾸만 방 안에서 이쪽저쪽 움직이고만 있지? 기분이 안 좋은가? 자기 집에 가고 싶은 것 아닐까?”
나는 동물원에 직접 가본 적은 없지만, 텔레비전 화면에서 본 동물원의 풍경을 기억한다. 공원처럼 아름답게 꾸며진 그곳에서 사람들은 풍선을 들고 솜사탕을 뜯으며 소풍 나온 것처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 낭만 사이에서 내 친구들의 얼굴이 어른어른 보였다. 그곳에선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듯했다. 호랑이며 사자가 ‘슬로모션’으로 재생해둔 것처럼 움직였다. 화면을 좀 더 깊이 들여다보면 그들의 눈빛이 보였다. 곧 울 것 같은 표정, 총기를 잃은 눈동자들, 기쁨도 슬픔도 없는 얼굴들. 아이는 거대한 슬픔의 공간을 본능적으로 알아챘다. 울타리 안에 고여 있는 고독과 기약 없는 시간을 마음으로 읽은 듯했다. 상상했던 동물을 만나지 못하고 돌아온 아이가 안쓰러웠다. 그날 나는 아이가 잘 때 그 옆에 살금살금 다가가 평소보다 더 꼭 붙어서 잤다. 아이가 꿈속에서라도 그날 낮에 겪은 거대한 슬픔과 싸우지 않도록, 보드라운 내 앞발을 아이의 어깨에 올려뒀다.
글·사진 만세 전업육아냥
mans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