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려인들을 대신해 육아를 하고, 늦은 밤 지쳐 쓰러진 육아냥.
새해가 되고 달라진 풍경이 있다. 나의 반려인은 해가 바뀌며 어디선가 득음을 하고 온 듯했다. “야아아~~!”
이것이 말로만 듣던 1춘기인가. 아이는 5살이 되는 순간 반항심이라는 마음 주머니를 어디서 얻어온 모양이었다. 옆에서 보고 있자니 복장이 터질 만도 했다. 이리 오라고 하면 저리로 가고, 식탁 위에 올라가지 말라고 하면 더 높은 서랍장 위로 올라갔다. 뛰지 말라고 하면 전력 질주를 하고, 빨리 움직이자고 하면 주저앉았다.
행동만 반대로 하는 것이 아니었다. 말대꾸도 늘었다. 자정이 되어야 잠자리에 드는 아이에게 엄마가 “우리 이제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것 어때? 아침에 어린이집 가기 전에 집에서 여유 있게 놀고 가면 좋지 않겠니?”라고 말했다. 그랬더니 아이는 “아니, 나는 늦잠 자고 바쁘게 어린이집 가는 게 좋은데?”라며 콧방귀를 뀌었다. 늘 기다리길 잘하던 아이는 이제 참을성 없이 엄마 아빠 말을 끊고 들어오곤 했다. “엄마, 이제 내가 얘기할 거야. 둘이 얘기 하지 마!”
그런 날을 마무리했던 어느 저녁, 아이 엄마는 불난 마음을 다독이며 평온을 찾기 위해 아이와 함께 목욕을 했다. 목욕을 하는 동안 몇차례 위기의 순간이 있었지만 무사히 넘기고, 도망가는 아이를 몇번이나 붙잡아 겨우 잠옷을 입혔다. 옷을 입으며 아이가 말했다. “나 안 잘 거야!” “그래, 그럼 더 놀다 자. 이제 머리 말리게 고개 좀 숙여볼래?” 아이는 만화에 나오는 듯한 과장된 동작으로 이마가 바닥에 닿을 듯 힘차게 고개를 아래로 숙였다. 꽈당! 뒤에 나올 지친 엄마의 대사는 뻔하다. “그러게 왜 그렇게 머리를 박도록 고개를 숙이니? 네가 그래 놓고 왜 울어.”
인간들의 육아는 으름장과 협박이 아니면 불가능한 걸까. 몇주 전까지만 해도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산타 할아버지를 핑계로 아이를 얼렀는데, 이제는 할 일 끝내고 돌아간 산타 할아버지를 불러올 근거도 없었다.
‘육아 에너지’를 소진한 반려인을 위해 내가 나설 차례였다. 아이가 다짜고짜 엄마 아빠 말을 끊고 들어오게 된 이유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었다. 더 많이 말하고 표현할 수 있게 된 아이는 엄마 아빠가 자기를 더 많이 지켜봐주고, 자기 얘기를 더 많이 들어주길 바라는 듯했다. 나는 아이가 그럴 때마다 아이 앞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어차피 인간 말을 못하긴 하지만) 가만히 앉아 있었다. 눈을 보고 귀를 기울여주면 아이는 과장된 행동이나 목소리를 줄이고 본래의 차분하고 다정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보고 좀 깨달으라고 오늘도 투정부리는 아이 앞에 석상처럼 가만히 앉아 있었는데… 반려인들아, 이제 한숨 그만 쉬고 우리 좀 봐 주겠니?
만세·전업육아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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