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향노루처럼 약한 초식동물은 다양한 생존전략을 구사한다. 한겨레 자료사진
호젓한 오솔길을 걷다 보면 뱀을 만나기도 한다. 사람을 보고 잽싸게 도망가면 십중팔구 독이 없는 놈이다. 반면에 사람을 보고도 멀뚱멀뚱 쳐다보며 느릿느릿 기어가면 독사다. 이빨에 품고 있는 독을 믿고 그런다. 이렇게 자기를 믿는 놈들이 또 있다. 육식동물이 그렇다. 표범을 예로 들자면, 쭉쭉 뻗은 날씬한 다리로 쏜살같이 달릴 수 있는 멋진 놈이다. 표범은 누구나 훤히 보이는 높은 나뭇가지에 걸터앉아 낮잠 잔다. 잠자는 동안에 누가 해칠까 봐 걱정하거나 노심초사 마음조이지 않는다. 자기 이빨과 빨리 달릴 수 있는 다리를 믿고 그런다.
새끼를 풀숲에 숨겨놓고 다니는 고라니
믿을 구석이 없는 초식동물들도 생존하려고 그들 나름의 방법으로 진화했다. 전략은 종마다 다르다. 동작이 느려 적을 따돌릴 수 없으면, 눈에 띌 시간을 줄이는 전략을 편다. 일단 풀을 잔뜩 먹고 눈에 잘 띄지 않는 풀숲에 들어앉아 되새김질함으로써 공격당할 가능성을 낮췄다. 새끼를 낳아 은폐가 잘 되는 풀숲에 숨겨놓고 엄마는 멀찌감치 떨어져 잘 보일만 한 곳에서 누가 오는지 망보는 전략도 쓴다. 그러다 누가 나타나면 시끄럽게 소리 내 관심을 끌어 새끼 쪽으로 못 가게 한다. 이는 고라니, 사향노루처럼 덩치가 작은 초식동물에서 대대손손 이어지고 있는 삶의 지혜다.
사향노루는 알면 알수록 약한 놈이다. 다 커도 10㎏ 내외로 왜소하다. 맹수처럼 날카로운 발톱도, 물어뜯어 공격할 튼튼한 이빨도 없고 말처럼 달리기 선수도 아니다. 순식간에 내달아 도망칠 만큼 민첩하지도 않다. 적에게 쫓기면 속수무책이다. 그래서 나무가 듬성듬성 난 곳을 선호한다. 적이 해치려고 들이닥칠지라도 나무가 앞을 가려 전력질주 못 하는 사이에 도망갈 수 있어서다.
웃기는 것은 배꼽 주위에 사향 주머니를 차고 있으니 후각이 발달해야 하는데, 청각이 더 예민하다. 위험한 상황이 닥쳤을 때 후다닥 도망갈 능력이 안 되니 누가 오는지 미리 알아채야 한다. 그래서 귀가 밝다. 바스락 소리만 나도 귀를 쫑긋 세워 누가 오는지 살핀다. 소리만 듣고도 방향과 위치를 알 정도다.
강원도 화천군 백암산 민간인통제선 지역에서 무인카메라에 포착된 사향노루. 국립환경과학원 제공
주로 동틀 무렵과 해가 질 무렵에 활동한다. 밤새 굶었으니 동이 트자마자 먹어야 하고, 해가 지면 먹지 못하니 미리 먹어두려는 것이다. 낮엔 한적한 곳에서 숨어 쉬는 편이고 인적이 뜸한 밤을 더 좋아한다. 밤에 풀을 먹으며 3~7㎞를 이동하기도 한다. 한 시간가량 풀을 뜯어 먹고, 숨어서 50여분 되새김질한다. 그러면 늑대나 담비 같은 적에게 노출될 시간이 준다. 사향노루는 겁쟁이다. 다니는 길로만 다닌다. 겁이 많아 다녀본 적이 없는 곳엔 발을 내디디지 않는다. 정해진 길로만 왔다 갔다 해서 길이 반질반질 나 있다. 신체적으로 공격할 무기가 없으니 그럴 수밖에 없다.
금값보다 비싸게 거래되는 사향
사람들은 야생동물을 먹잇감으로 잡아간다. 산토끼도, 멧돼지도, 고라니도 먹으려고 숨통을 끊어 잡아간다. 낚시를 취미로 한다지만 먹겠다는 생각이 뒤에 깔려있다. 현대엔 가축이 넘쳐나고 있다. 수렵생활이 그리워서 사냥하는 것일까?
사람들이 야생동물 부산물에 눈독 들인 경우도 있다. 곰의 쓸개와 사향노루의 사향이 대표적인 예다. 보호하려고 법으로 밀렵을 막다 보니 곰 대신 멧돼지나 돼지의 쓸개, 사향노루 대신 사향고양이의 사향이 그 역할을 해 주기도 한다. 하지만 곰쓸개와 사향을 찾는 사람이 꾸준히 있다. 그만한 것이 없어서 밀렵과 밀거래가 은밀히 이뤄지고 있다. 그래서 사향노루가 가장 무서워하는 천적은 사람이다.
사향노루는 중앙아시아, 동북아시아, 카슈미르(인도, 파키스탄에 인접한 분쟁지역), 시킴(네팔과 부탄 사이 지역), 중국 북쪽 지방, 시베리아, 몽골, 만주, 한국에 걸쳐 두루 서식한다. 법·제도가 허술한 나라에서는 아직도 밀렵 당한 사향의 뒷거래가 버젓이 이뤄진다. 한국은 사향노루를 천연기념물 제216호, 멸종위기 1급으로 지정해 법적으로 보호하고 있다. 법적 보호 장치가 느슨하던 시기에 우리나라에서도 밀렵이 왕왕 있었다 하나 지금은 꿈도 못 꾼다.
사향은 금값보다 비싸게 거래돼 한 마리만 잡아도 노다지를 캐는 것과 같아 밀렵꾼이면 누구든 눈독 들였다. 사향은 향수 소재로 매우 좋고 약효가 뛰어나 약재로 이용되고 있다. 이런 수요로 너도나도 찾다 보니 씨가 말라가고 있다. 이 현상은 우리나라는 물론 다른 나라에서도 별반 다르지 않다. 야생에서 사향노루 씨가 마르기 전에 살려내야 한다.
사향노루에겐 한겨울 눈이 멸종의 함정
사향노루 밀렵도 문제지만 겨울에 내리는 눈도 문제다. 가을부터 다음해 새순이 돋아 날 때까지 먹을 것이 많지 않다. 눈이 오면 이것마저 눈에 파묻혀 굶는 날이 많다. 장기간 폭설이 이어지면 굶어 쓰러져 일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생긴다. 이럴 때 먹이를 주면 살릴 수 있다. 뒤에서 보이지 않게 묵묵히 그렇게 돕는 사람들이 있다.
사향노루는 우리나라 몇 곳의 깊은 숲에 드문드문 몇 마리씩 서식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안타깝게도 개체수가 매우 적다. 서울대공원 행동풍부화 동아리 회원들이 2014년 2월부터 사향노루를 돕고 있다. 강원도 민통선 근처 사향노루가 잘 다니는 길목에 비 가림 먹이대를 여러 개 만들어 놨다. 매년 겨울에 정기적으로 그 안에 먹이를 주고 있다. 염분과 미네랄 등 영양 보충을 위해 ‘링카블록’도 듬성듬성 매달아 놨다. 눈이 올지라도 작은 움막 지붕에만 쌓일 뿐 먹이가 눈에 뜨여 굶어죽는 사태는 막고 있다.
2005년 9월 강원도 양구에서 붙잡힌 사향노루 수컷이 한국산양·사향노루종보존회 방사장에서 보호받고 있는 모습.
2015년 1월에 일손을 거들어 준 적이 있는데 ‘동아리 회원들의 능숙한 솜씨와 의지가 있어 이 일이 오래 지속 되겠구나!’ 예측했었다. 아니나 다를까, 지금까지 지속하고 있고 관심의 열기는 더해 간다. 이 일을 주도한 한효동 주무관이 팀장으로 진급했고, 박선덕 팀장이 사무관 발령을 앞두고 있다는 소식을 얼마 전에 들었다. 좋은 일에 발 벗고 나서면 훗날 보답이 오는 것 같다.
동아리 회원들의 노력으로 사향노루 개체 수가 얼마나 많이 증가했는지 파악하지 못했으나, 무인카메라(CCTV)에 찍힌 자료를 보면 분명히 도움이 되는 것으로 본다. 동물원을 다른 말로 ‘보전센터’라 한다. 이런 일이 종 보전이며 동물원에서 해야 할 일 중 하나다. 인도네시아의 왕도마뱀 코모도 서식지를 방문한 적이 있다. 미국 샌디에이고 동물원 직원들이 인도네시아 코모도 서식지까지 와서 보호 활동을 한다는 소식을 듣고 놀랐었다. 앞으로 국내 동물원도 단순 관람 수준을 벗어나 보전센터로서 기능을 더 할 것으로 기대한다.
노정래 전 서울동물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