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반달곰 KM53이 경북 김천 수도산을 향해 가며 도로를 건넌 흔적. 반달곰의 서식지를 지리산 바깥으로 열어줬으나, 교통사고와 로드킬 대책은 미비한 실정이다. 국립공원관리공단 제공
동물의 경우 자식이 독립해서 혼자 살 수 있을 때까지 부모가 최선을 다해 보살핀다. 다 크면 부모가 인정사정 봐주지 않고 자식을 내쫓는다. 자식이 안 나가려고 버텨도 보살피기는커녕 본체만체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나가라고 괴롭히기도 한다. 부모와 자식 관계일지라도 먹이를 차지하려고 서로 싸우는 경쟁 상대로 돌변하니 곁에 둘 리 없다. 싫든 좋든 자식은 부모의 활동 반경 밖으로 나간다. 형제자매도 다 크면 남남처럼 서로 다른 곳에서 산다. 포유류도 그렇고 조류도 마찬가지다. 이런 식으로 떠나니 울타리가 없는 서식지에서 혈연관계가 가까운 근친끼리 번식할 가능성이 매우 낮다.
가족을 떠나 정착할 곳을 찾던 어린 암컷은 수컷과 눈이 맞아 짝을 이뤄 일찌감치 발붙여 살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수컷은 다르다. 청소년 딱지를 갓 뗀 어린 수컷은 암컷이 거들떠보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경쟁 상대인 수컷들은 한술 더 떠 밀쳐낼 테니 가장자리로 밀려나야 한다. 만약에 영역을 설정해 놓고 사는 종이라면 한판 붙어 다른 놈의 영역을 일부 빼앗아 살거나 누구도 차지하지 않은 땅이 나올 때까지 이동해야 한다. 주위에 개체수가 많을 경우 터를 잡을 때까지 구성원끼리 많은 갈등을 겪어야 하며 어떤 식으로든지 이동할 수밖에 없다. 이동하지 못하게 막아도 어떻게든지 뚫고 나갈 것이다. 자연의 질서다. 최근 지리산 반달가슴곰 KM53이 증명해줬다.
생후 9개월째 방사된 KM53
KM53이란 이름으로 불린 수컷 반달가슴곰은 2015년 1월 태어나 그해 10월에 방사됐다. 생후 9개월째 방사된 것이다. 지난해 6월 지리산을 벗어나 90㎞ 떨어진 경북 김천 수도산으로 가자 잡아 왔다. 그해 8월에 다시 지리산에 놔 줬지만 지리산을 또 벗어났다. 또 잡아 왔다. 이는 “넌 시키는 대로 지리산에만 살아”라는 지극히 인간적인 생각이다. KM53은 비웃기라도 하듯 지리산을 두 번이나 벗어났다. 이렇게 알려진 일이 처음이지만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동물 대부분이 그렇게 부모를 떠나 살고 있다. 반달가슴곰도 마찬가지다. 이 사건을 계기로 반달가슴곰이 지리산 바깥으로 나가도 잡아들이지 않기로 환경부 관리 정책이 바뀌었다. 즉 반달가슴곰 개체관리에서 서식지 관리로 전략이 바뀐 것이다.
동물만 떠날까? 식물도 마찬가지다. 떠나는 방법은 종마다 달라 봉숭아 씨앗은 폭죽처럼 터트려 분산하고, 민들레는 낙하산처럼 바람을 타고 떠나고 도꼬마리는 동물의 털에 붙어 멀리 간다. 상수리나 도토리는 아예 동물에게 미끼로 먹힌 뒤 일부는 살아남는 전략을 쓴다. 다 여문 씨앗이 엄마를 떠나지 않은 종들은 근친도 문제지만 엄마와 자식, 형제끼리 경쟁하느라 생존하기 어렵다. 반면에 엄마를 떠난 종들은 극한 상황이 닥쳐서 대부분 죽을지라도 일부가 살아남아 대를 이어 멸종하지 않는다. 씨앗이 알아서 떠날까? 아니다. 동물이건 식물이건 자식이 떠나는 것은 진화의 결과이며 생존하는 방법이다.
지리산 반달곰 KM53. 두번이나 90㎞ 떨어진 수도산에 갔다가 잡혀 온 뒤, 세번째 가는 길에 교통사고를 당했다. 국립공원관리공단 제공
안타깝게 KM53이 최근에 지리산을 다시 빠져나와 북진하다 통영 대전간 고속도로 함양 분기점 근처에서 차에 치였다. 다시 포획해 건강상태를 점검한 결과 왼쪽 앞다리 어깨부터 팔꿈치까지 복합골절을 입었다. 이 사고를 계기로 반달가슴곰 관리정책이 원래대로 되돌아가지 않길 바란다. 반달가슴곰도 본능대로 다 자란 새끼가 어미를 떠나거나, 짝을 찾아 이동하거나 어떤 이유이든 좋은 조건을 찾아 이동할 가능성은 늘 있다. 만약에 어린 개체라면 힘이 약해 발붙일 곳이 없어 더 멀리 갈 수밖에 없다. 현재 지리산에 반달가슴곰 56마리가 서식하고 있다. 이놈들이 지리산을 벗어날 때마다 멱살 잡아 데려올 수 있을까? 앞으로 지리산에 반달가슴곰 개체 수가 더 늘어날 텐데 감당할 수 없는 일이다. 자연의 질서를 막을 순 없다.
2013년 미국 올랜도에서 개최했던 세계동물원수족관협회(WAZA)에 참석해 코끼리가 원주민과 공존하는 사례 발표를 들은 적이 있다. 서식지에서 코끼리들이 농작물에 손을 대자 골치가 아팠다. 농장 주위에 벌을 키워 코끼리와 인간이 공존하게 됐다는 내용이었다. 코끼리가 벌을 싫어한다는 간단한 원리를 이용한 것이다. 반달가슴곰이 싫어하는 것이 뭘까? 그게 초음파든 천적의 소리든 사람과 공존할 방안이 필요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딘가에서 동물들이 차에 치여 죽고 있다(로드킬). 이참에 로드킬을 줄일 방안을 마련하면 좋겠다. 예산을 많이 들여 곳곳에 에코브리지를 만들자는 얘기가 아니다. 예를 들자면 동물이 싫어하는 초음파가 나오는 장치를 로드킬 가능성이 큰 곳에 설치하면 생물다양성에 기여할 것으로 본다. 고라니가 초음파에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것을 국내 관련 업체에서 이미 밝혀냈다. 연구가 더 필요하지만 여러 종을 살려낼 방안이 있어 보인다. 그렇다고 모든 길목을 초음파로 틀어막아 태어난 곳에 가두자는 얘기가 아니다. 사고가 날 가능성이 있는 곳에 접근하지 못하게 하되 생태통로를 열어 둬야 자유롭게 이동한다.
지난 11일 KM53이 경남 함양군 태봉산 근처에서 포획되어 검진을 받고 있다. 왼쪽 앞다리 어깨부터 팔꿈치까지 복합골절로 밝혀졌다. 국립공원관리공단 제공
반달가슴곰이 이동할 가능성이 있는 도로에는 운전자에게 주의를 당부할 필요도 있다. 시민들도 공감하고 협조해야 한다. 특히 곰이 어느 계절에 이동이 빈번한지 자료를 공유하면 더 효과적일 듯하다. 그동안 쌓인 자료를 분석하면 가능하지 않을까? 반달가슴곰 이동이 빈번한 계절이나 시기는 예측할 수 있어 보인다. 예로서 멧돼지는 이른 봄부터 초가을까지는 깊은 산 속에서 생활한다. 먹이가 풍족한 점도 있지만 한적한 곳에서 새끼를 낳아 기르려는 의도적인 행동이다. 새끼가 적당히 크면 초가을 무렵부터 산 아래쪽 민가 주위 논이나 밭 근처까지 내려와 생활한다. 멧돼지는 이런 패턴으로 이동한다. 지리산 반달가슴곰 복원을 2004년부터 시작했다. 이젠 반달가슴곰 보전에 필요한 자료가 쏟아져 나올 때도 됐다.
우리는 동물의 마음을 읽지 못한다
자연의 세계를 사람들 시각으로 보거나 종종 동물의 마음을 예측하기도 한다. 사람이 동물의 마음을 정확히 읽지 못한다는 것을 KM53이 보란 듯이 보여줬다. 동물의 활동과 이동을 제한하는 동물원에서 특히 주의해야 한다. 태어난 새끼가 다 자라 가족을 떠날 나이까지 부모랑 함께 길러야 한다. 그렇다고 다 컸는데 너무 늦게까지 함께 살게 둬서도 안 된다. 서식지에서야 알아서 멀어지지만 동물원에서는 울타리가 있어 인위적으로 옮겨줘야 한다. 늦게까지 함께 살게 하면 서로 스트레스를 받아 괴롭다. 무엇보다 근친끼리 번식할 가능성도 있어 주의해야 한다. 참고로 반달가슴곰(Asiatic Black Bear)은 생후 3~5개월이면 젖을 떼지만 2~3살에 어미로부터 독립한다. 반려동물과 함께 살거나 야생동물 보전 업무를 하는 곳에서는 이번 기회에 ‘인간 관점으로 동물을 대하고 있는지’ 점검해 보면 어떨까?
노정래 전 서울동물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