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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포] “520m 막장 얼매나 지픈지, 가는 디만 40분 걸려”

등록 2023-06-30 07:00수정 2023-06-30 17:08

막내리는 탄광시대 _ 화순탄광 가보니
대한석탄공사 화순광업소에서 30여년 동안 광부로 일한 정철진씨가 폐광을 앞두고 운행을 멈춘 궤도차를 설명하고 있다. 김용희 기자 kimyh@hani.co.kr
대한석탄공사 화순광업소에서 30여년 동안 광부로 일한 정철진씨가 폐광을 앞두고 운행을 멈춘 궤도차를 설명하고 있다. 김용희 기자 kimy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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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년 화순광업소는 영원히 기억될 것입니다”.

펼침막의 글자들은 바람이자 절규였다. 소멸에 대한 두려움이었고, 잊히는 것에 대한 불안이었다. 그러나 ‘지나간 118년’으로 ‘불멸의 기억’을 살 수는 없는 법이다. 지난 20일 찾은 전남 화순군 동면 복암리 대한석탄공사 화순광업소는 열흘 앞으로 다가온 폐광을 쓸쓸하게 준비하고 있었다. 광업소 입구에는 “노동자 여러분의 노고를 기억하겠습니다”라는 펼침막도 함께 걸려 있었다.

곰팡이 핀 갱도, 거미줄 엉킨 컨베이어

“오메, 사람이 안 다닝께 곰팽이가 다 피어부렀어야.” 화순광업소 동1사갱 앞에서 정철진(60)씨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했다. 그는 30년 광부 생활 동안 갱도에서 쥐는 많이 봤어도 곰팡이가 핀 건 처음 본다고 했다. 정씨의 말은 놀라움의 표현이라기보다 ‘내 평생 일터가 어쩌다 이런 처지가 됐나’라는 탄식처럼 들렸다.

무연탄(석탄) 광산인 화순광업소는 정부의 폐광 정책에 따라 30일 문을 닫는다. 공식 폐광일이 그날일 뿐, 탄 캐는 일을 중단한 지는 시간이 좀 됐다. “4월30일로 채탄 일은 다 끝났습니다. 원래는 연말까지 석탄을 캘 계획이었는데, 안전 문제도 있고, 채산성도 안 맞고….” 이동현 화순광업소 생산부장이 말했다. 광부들의 근로 의욕도 떨어지고, 안전관리 부담도 적지 않아 석탄공사와 노조가 ‘조기 폐광’에 합의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화순광업소의 지난해 무연탄 생산량은 6만3000톤이었다. 생산량이 가장 많았던 1989년(70만5000톤)에 견줘 10분의 1이 채 안 된다.

광부들로 북적이던 광업소 경내는 시설과 장비를 점검하는 필수 인력만 드문드문 오갈 뿐 조용하고 한산했다. 땅 밑에서 캔 탄 덩어리를 갱도 밖으로 실어나르던 컨베이어벨트에는 거미줄이 어지럽게 엉켜 있고, 장비 운반용 궤도차도 먼지를 뒤집어쓴 채 갱도 입구에 방치돼 있었다. 가끔씩 들려오는 까치 울음소리만 산골 광산의 적막함을 흩트려놓을 뿐이었다.

갱도 안으로 발걸음을 옮기자, 습기를 잔뜩 먹은 탄가루와 진흙이 신발에 달라붙었다. 흙덩이의 무게 때문에 발을 떼기가 쉽지 않을 정도였다. 채탄이 이뤄지던 시절엔 작업복, 작업화, 안전모에 개인용 조명기구를 착용하지 않으면 출입이 엄격히 제한됐던 곳이다. 갱도 벽면에는 “재해발생 예고없다” “재해예방은 가장 확실한 행복보험입니다” 같은 ‘안전 표어’가 여기저기 붙어 있었다.

4월30일 채광을 종료한 대한석탄공사 화순광업소 동갱 입구에 하얀 곰팡이가 피어 있다. 김용희 기자 kimyh@hani.co.kr
4월30일 채광을 종료한 대한석탄공사 화순광업소 동갱 입구에 하얀 곰팡이가 피어 있다. 김용희 기자 kimyh@hani.co.kr

수직 600m를 오르내리던 막장 생활

한때 1000명이 넘는 광부들을 지하 갱도로 실어나르던 인차도 철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인차는 해발 110m에 위치한 지상 탑승장에서 마이너스(-) 520m 지점의 19편(층을 세는 단위) 갱도까지 오갔는데, 화순광업소에는 0~19편 사이에 80㎞ 길이의 갱도가 뚫려 있다고 한다. 이동현 생산부장은 “석탄층 강도에 따라 수직 40∼50m마다 1편씩 수평갱도가 있다”며 “10년 전 18편(-481m)까지 파 내려간 뒤 2015년 19편 갱도를 뚫었지만, 석탄 수요가 줄고 폐광 정책이 가시화하면서 본격적인 채탄은 이뤄지지 않았다”고 했다. 무연탄은 각 편의 천장에 폭약을 설치해 무너뜨리는 방식으로 채굴이 진행된다.

“19편 막장까지 갈라믄 인차를 두번 갈아탔어. 얼매나 지픈지(깊은지), 가는 디만 40분이 걸려부러.” 정철진씨가 말했다. “아따 근디 희한하게, 지하로 내려갈수록 온도가 올라가. 한증막 들어간 거맨키로 땀이 나. 오죽했으믄 하루에 작업복을 세벌씩 갈아입었겄어?”

무연탄을 쌓아 두던 전남 화순군 동면 복암리 인근 야산이 화순탄광의 채굴 중단으로 바닥을 보이고 있다. 김용희 기자 kimyh@hani.co.kr
무연탄을 쌓아 두던 전남 화순군 동면 복암리 인근 야산이 화순탄광의 채굴 중단으로 바닥을 보이고 있다. 김용희 기자 kimyh@hani.co.kr

1980년대까지도 화순광업소 인근 구암삼거리는 식당, 술집, 다방 등이 몰려 있는 번화가였다. 월급날만 되면 술집 주인들이 외상값을 받으러 화순광업소 앞에 줄을 서서 기다렸다고 한다. 한때 700가구를 웃돌던 복암리 인구는 지난해 말 기준 261가구 374명으로 줄었다. 김종현(75) 복암리 이장은 “옛날에는 광업소 사람들이 마을에 많이 살았는데 지금은 다 빠져나가고 원래 주민들만 남았다”며 “광업소 자리에 뭐가 생길지 기대가 되면서도 마을이 더 쇠퇴할까 봐 불안감도 있다”고 말했다. 폐광 터를 어떻게 활용할지는 산업통상자원부가 내년 9월에 나올 용역 결과를 근거로 발표할 예정이다.

대한석탄공사 화순광업소에서 일하다 순직한 광부들을 기리는 추모비. 김용희 기자 kimyh@hani.co.kr
대한석탄공사 화순광업소에서 일하다 순직한 광부들을 기리는 추모비. 김용희 기자 kimyh@hani.co.kr

너릿재서 군정 경찰과 충돌했던 선배 광부들

마지막 노조 지부장(38대) 손병진(56)씨에겐 또 다른 아쉬움이 있다. 화순에서 나고 자란 손씨는 32년째 화순광업소에서 일했다. “여그가 엄청 중요한 곳이여. 화순탄광을 빼놓고선 한국 노동운동사를 못 쓴당게.”

화순탄광은 1926년 경북 문경광업소에 이어 남한 지역에서 두번째로 채탄을 시작한 무연탄 광산이다. 대한제국 시절인 1905년 광산업 허가를 얻었고, 1931년 광주에서 일본인이 운영하던 종연방직(전남방직 전신)에 연료를 공급할 목적으로 채굴을 시작했다. 1935년에는 또 다른 일본인이 남선탄광 운영을 시작했다. 1945년 8월 해방 뒤 미군정은 종연탄광과 남선탄광을 ‘화순탄광’으로 통합해 직할 운영했다. 광부들은 높은 물가와 노동 강도에 견줘 턱없이 모자란 임금을 받자 1945년 11월 좌익 성향의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 계열 노동조합을 창설했다.

1946년 8월엔 좌익 계열에서 주최한 광복 1주년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광주로 가던 화순탄광 광부들이 화순과 광주의 경계인 너릿재에서 미군정 기마경찰과 충돌했고, 그해 10월 탄광노조 파업은 학생과 농민이 가세한 3000명 규모의 시위로 번졌다. 파업은 그해 11월 군정당국이 노조를 급습해 지도부를 체포하면서 일단락됐는데, 이 과정에서 수십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노조는 힘을 잃었지만, 저임금·노동조건 개선을 위한 파업은 1960년대까지 이어졌다고 한다. 손병진씨는 “처우 개선을 위해 힘써준 선배 광부들이 있어 우리 후배들이 마음 편히 일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안전사고 경각심을 일깨우기 위해 전남 화순광업소 내부에 설치된 나무 지지대. 현재 갱도는 철제 지지대로 보강하지만 1980년대까지는 나무 지지대를 사용해 붕괴 사고가 빈번하게 일어났다. 김용희 기자 kimyh@hani.co.kr
안전사고 경각심을 일깨우기 위해 전남 화순광업소 내부에 설치된 나무 지지대. 현재 갱도는 철제 지지대로 보강하지만 1980년대까지는 나무 지지대를 사용해 붕괴 사고가 빈번하게 일어났다. 김용희 기자 kimyh@hani.co.kr

“탄 캐던 사람한테 배 만들라면 쉽겄소?”

탄광이 문 닫으면 일하던 광부들은 새 일터를 찾아야 한다. 화순광업소 전체 직원 272명 가운데 56명이 한창 일해야 할 20∼40대다. 전라남도는 실직자들을 위해 현대삼호중공업(영암), 대한조선(해남) 등 전남 지역 조선업체 취업을 알선하고 있다.

그러나 광부들은 내키지 않는 분위기다. 정철진씨가 말했다. “여그 광부들, 일단 건강 상태부터 확인해야 돼. 어깨고 팔목 인대고 부상을 안 달고 사는 사람이 없어, 근데도 불이익 받을까 봐 산재 신청도 안 했어.” 사정이 그렇다면 막장에서 탄 캐는 일보다는 지상의 조선소에서 하는 용접 일이 조금은 수월하지 않을까? 하지만 이어진 정씨 말은 달랐다.

“십수년을 땅 속에서 탄 캐던 사람한테, 인자부터 갯가 나가서 배 만들라 그러믄 그거시 쉽겄소?” 너릿재를 넘어 광주로 향하는 내내 마음이 무거웠다.

김용희 기자 kimy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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