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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촌 노인들 점심 공동체…“돈 있어도 밥보다 고픈 건 관심”

등록 2016-12-20 09:49수정 2016-12-20 11:32

[대한민국 경로당 보고서 (중)]
서울 송파구 잠실 ㅍ아파트 경로당
회원 28명 중 24명이 팔십 넘어
주5일 점심 도우미 고용 도움받아
86살 박할머니는 화요일엔 ‘외도’
김치·나물만 나오는 이곳보다
불고기 나오는 노인대학서 점심
유모차로 거동하는 89살 김할머니
“집에 있으면 뭐해·혼자 먹는 밥 고역
따뜻한 점심 말 섞으며 먹으니 좋아”
서울 송파구 ㅍ아파트 경로당 회원들이 건강체조 강사의 지도에 따라 밴드체조를 하고 있다. 국민건강보험공단에서 매주 2차례 강사를 파견하는데, 이 경로당이 내년에도 지원받을지는 알 수 없다. 사진 원낙연
서울 송파구 ㅍ아파트 경로당 회원들이 건강체조 강사의 지도에 따라 밴드체조를 하고 있다. 국민건강보험공단에서 매주 2차례 강사를 파견하는데, 이 경로당이 내년에도 지원받을지는 알 수 없다. 사진 원낙연
지난달 8일 오전 서울 송파구 잠실4동 ㅍ아파트 경로당에 비상이 걸렸다. 점심식사를 준비해야 할 식사 도우미가 출근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통화가 되지 않던 도우미는 이날 오전 11시가 지나서야 ‘집안 일로 늦었다’며 미안해하는 얼굴로 나타났다.

이 경로당 변아무개(82) 회장은 “쌀은 남아도는데 밥할 사람이 없다”며 경로당의 가장 큰 문제로 점심 준비를 꼽았다. 이 경로당 회원 28명 가운데 80대 이상이 24명이다. 변 회장은 “70대가 경로당에 다닌다고 하면 ‘벌써 노인정 가냐’는 소리를 듣는다. 요즘 경로당은 ‘여든 살이나 돼야 가는 곳’으로 여긴다”고 말했다. 80대 경로당 회원 대부분 거동이 불편해 점심 준비하기가 쉽지 않다. 더 젊고 건강한 회원이라고 심부름을 시켰다간 사달이 난다. 그는 “올 여름을 앞두고 막내였던 60대 할머니에게 ‘창고에서 꺼낸 선풍기를 닦아 달라’고 했더니 다음날부터 나오지 않더라”며 “70대라고 심부름 시켰다간 큰일 나지, 안 시켜”라고 말했다.

이는 <한겨레>가 보도한 전남 영광 하낙월도 경로당에서 어르신 두 세명이 모이면 자연스럽게 점심 식사를 준비한 것과는 사뭇 다른 풍경이다. 오랜 세월을 같이 지내 흉허물이 없는 하낙월도 할머니들과 달리 낯선 타인들이 모인 서울이란 대도시의 익명성이 빚은 차이다. <한겨레> 12월19일치 1·14면 참조

송파구청은 경로당 식사 도우미의 인건비로 1년에 7개월 동안 매달 20만원씩 지원해준다. 주 5일 오전 내내 점심식사를 준비해야 하는 도우미를 월 20만원에 구하기는 쉽지 않다. 변 회장은 “아파트에서 지원해주는 돈에다 회원들이 월회비 5천원씩 보태 겨우 맞춰주고 있다”고 말했다.

그나마 주 5일 식사 도우미를 구한 경로당은 사정이 나은 편이다. 반아무개(94) 할머니는 ㅍ아파트 바로 옆 ㅁ아파트에 살면서 ㅁ아파트 경로당과 이곳을 번갈아 나온다. ㅁ경로당 식사 도우미가 월·수·금 주 3일만 나와 점심식사를 준비하기 때문에 화요일과 목요일은 이 경로당에 나와 점심을 해결한다. 반 할머니는 ㅍ아파트 52평 짜리 집을 아들에게 물려주고 ㅁ아파트 19평에 전세로 살고 있어, 경로당 두 곳 모두 회원으로 등록할 수 있었다.

서울 송파구 잠실 ㅍ아파트 경로당 점심식사 때 채소류가 아닌 반찬이 오랜만에 상에 올라왔다. 한 회원이 기증한 닭발로 만든 볶음은 맛있었지만 이가 성치않은 어르신들은 씹기 힘겨워했다.사진 원낙연
서울 송파구 잠실 ㅍ아파트 경로당 점심식사 때 채소류가 아닌 반찬이 오랜만에 상에 올라왔다. 한 회원이 기증한 닭발로 만든 볶음은 맛있었지만 이가 성치않은 어르신들은 씹기 힘겨워했다.사진 원낙연
반 할머니의 단짝인 박아무개(86) 할머니는 ㅍ아파트에 살지만 두 곳 경로당을 함께 등록했다. ㅁ경로당이 회원이 계속 줄자 박 할머니도 회원으로 받아준 것이다. 지은 지 40년 가까이 돼 재건축을 앞둔 ㅁ경로당은 전에는 17~18명이 점심식사를 했는데 지금은 13명만 식사하고 있다. 박 할머니는 “ㅁ경로당 도우미가 만든 음식이 더 맛있어서 월·수·금은 꼭 거기에 가서 점심식사를 한다”고 말했다. 박 할머니는 화요일 점심은 근처 교회 노인대학에서 먹는다. 경로당 점심은 김치·나물 등 채소류가 대부분인데, 교회 노인대학은 불고기, 샐러드 등 반찬이 다양하고 맛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이 경로당의 가장 큰 문제이자 관심사는 밥이다. 더운 점심을 이웃들과 이야기하며 먹을 수 있는 ‘점심 공동체’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제대로 걷지 못하고 늘 유모차를 잡고 이동하는 김아무개(89) 할머니는 집 앞에 있는 경로당에 올 때마다 중간에 3번이나 쉬어야 해 10분 이상 걸린다. “경로당에는 밥 먹으러 와. 같이 밥도 먹고. 집에 혼자 있으면 티브이만 보고, 밥도 차려먹기가 싫은 거라. (자식과 손주들은) 다 야근에다 학원에 가서 저녁에 혼자 있을 때는 냉장고에서 반찬 꺼내기도 어려워서 그냥 국에 밥 말아서 한 끼 때우고 말지.” 혼자 식사하는 것이 고역인 노인 여럿이 모여 수다를 떨 수 있는 점심을 기다리는 것은 서울 잠실 아파트 경로당이나 전남 영광 하낙월도 경로당이나 마찬가지다.

조용하던 경로당이 가장 활기가 도는 때는 점심 먹고 난 뒤 화투를 칠 때다. 건강체조, 안마 등 복지관이나 국민건강보험공단에서 지원하는 프로그램이 있지만 ㅍ경로당 최고의 인기 종목은 고스톱이다.

비록 10원짜리 고스톱이지만 참가자들은 사뭇 진지하다. 중간 중간 언성도 높아진다. ‘누가 선이었는지’, ‘패가 왜 남았는지’를 놓고 실랑이를 벌인다. “니가 선이잖아. 내가 대신 쳐줬잖아.” “누가 선인지도 모르고 치는 거야?” “저 할머니는 오락가락해서 잘 잊어버려.” 투닥거림은 오래 가지 않는다. 파투를 선언하고 새로운 게임에 돌입하면 투덜거리던 이도 금세 조용해진다. 몸이 불편해 패를 돌리기 어려운 사람은 옆에서 대신 돌려준다. 점수 계산하기 어려운 이도 좌우에서 계산해준다. 그런데 치매 초기 증세가 있는 어르신도 3~4점 정도는 바로 계산해서 “났다”를 외친다.

한 할머니는 “심심하지 않고, 시간 잘 가고, 괜히 남의 말 안하고, 남의 흉 안 봐서 좋아. 딸 때는 200~300원 따는데 잃는 날은 1천원 넘게도 잃어. 한번은 1800원 잃은 날도 있어. 그래도 따고 잃는 그 재미에 쳐”라고 말했다. 점수가 아무리 많이 나도 한판에 200원 상한선을 둬 크게 잃는 사람도 없다. 게임이 끝나면 “아까 내가 500원 줬던가?”, “아니, 몰라”, “그럼 받어” 등의 대화도 오간다. 10원짜리 동전을 모아둔 통이 무거워 경로당에 두고 다니는 사람도 있지만, 잃어버린 적은 없단다.

고스톱 판에서 시비가 붙을 때 판정을 도맡는 이는 최고령자인 반 할머니다. 경로당에 나오는 이유로 화투를 꼽는 그는 회원들도 똑똑하다고 인정할 정도로 정정하다. “전화번호 5개 이상 외워야 치매가 아니라며. 5개가 뭐야? 자식들은 물론 친구들 것까지 다 외워”라고 자랑했다.

반 할머니가 94년 평생 가장 후회하는 건 10여년 전 퇴행성 관절 수술하자는 의사의 권유를 “죽을 때 다 돼서 뭔 수술이냐”고 거부한 일이다. 그 결과 약물치료를 받은 오른쪽 무릎 때문에 매년 넘어지는 사고를 겪고 있다. “뒤늦게 수술을 받으려 하니 지금은 심장에 무리가 가서 안 된다고 하더라. 그때는 이렇게 오래 살 줄 알았나?”

부자 동네로 불리는 이른바 강남 3구중 하나인 송파구 ㅍ경로당 회원 대부분은 자기 명의나 자식 명의로 아파트를 보유하고 있다. 박 할머니는 50년 동안 약사로 일하고 몇 년 전에 은퇴했다. 자신의 소유 상가에서 약국을 하다 아파트 상가가 재건축을 한 뒤 지금은 보증금 2억원, 월세 850만원에 상가를 임대해주고 있다. 3년 전에 상가는 아들에게, 아파트는 딸에게 증여하고 자식들이 주는 용돈 300만원을 받고 있지만, 다 쓰기도 어렵다.

문아무개(74) 할아버지도 근처 건물 1층을 소유하고 있다. 식당에 임대해주고 월세 600만원을 받는다. 40년 동안 건축업을 해 점포와 30평대 아파트까지 약 35억원의 자산을 마련했다.

반면 전세나 월세 등 임대로 살고 있는 회원도 있는데, 경로당에선 잘 드러내지 않는다. 김아무개 할머니는 “함께 사는 아들네가 전세라 다른 회원들이랑 비교돼 자존심이 상한다”고 토로했다. 같은 처지의 다른 회원에 대해 묻자 “전·월세 사는 사람은 얘기를 잘 안 해서 모르겠다”고 말했다. 눈빛만 봐도 걱정거리가 생겼는지 아픈 데가 도졌는지 금세 알아차린 하낙월도 경로당과는 다른 모습이다. 부동산 값이 턱없이 싼 그 곳에 전세나 월세가 있을 리 만무하다.

김 할머니는 10년 전 남편과 사별한 뒤 둘째 아들과 살림을 합쳐 이 아파트에 45평 전세를 얻었지만, 2년 뒤 전세금이 올라 같은 단지 32평으로 이사를 했다. 내년 2월 계약이 끝나는데, 집주인이 월세로 전환하려고 해 걱정이다. 전세금은 6억8천만원이다. “아무래도 이사가야 할 것 같은데, 손자들이 고3, 고1이라 이 동네를 떠날 수 없다. 요즘 전셋집 구하기 힘들어 걱정”이라고 말했다.

지난달 3일 오후 장아무개(82) 할아버지의 둘째딸(55)이 배 10여개를 들고 경로당에 들렀다. 젊은 사람이 배를 깍고 썰어 접시에 담아 내놓자 어르신들은 기분이 좋다. 귀가 어두워 평소에는 대화도 없이 무표정하게 앉아 티브이만 보고 있던 장 할아버지 얼굴에도 뿌듯한 미소가 떠올랐다. “친정아버지는 한두 달에 한번씩 찾아뵙는데, 경로당은 2년 만에 왔네요. 아버지께 ‘오래간만에 경로당 어르신들 찾아뵐까요’라고 말씀드렸더니 은근히 좋아하시는 것 같아서 왔어요.” 딸의 이야기에 장 할아버지도 “이왕이면 여기 와서 함께 지내는 어르신들께 인사하고 가면 좋지”라고 말했다. 사실 어르신들은 밥보다 관심이 더 고프다.

글·사진 원낙연 기자 yann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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