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전국 전국일반

고려인 엄마 한국 사는데, 난 19살 되면 추방이라니…

등록 2017-05-01 21:08수정 2017-05-02 14:55

[밥&법] ‘동포 아닌 외국인’ 고려인 4세의 눈물
고려인 동포 초등학생들이 지난달 25일 오후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사동 고려인지원센터 ‘너머'에서 한국어 공부를 하고 있다. 부모가 모두 일하는 탓에 아이들은 오후 7시까지 이곳에서 주로 시간을 보낸다. 고려인 4세인 이들도 19살이 넘으면 80년 전 증조부모가 강제이주 당한 그 나라로 돌아가야 하는 탓에 러시아어도 함께 배운다. 안산/김성광 기자 flysg2@hani.co.kr
고려인 동포 초등학생들이 지난달 25일 오후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사동 고려인지원센터 ‘너머'에서 한국어 공부를 하고 있다. 부모가 모두 일하는 탓에 아이들은 오후 7시까지 이곳에서 주로 시간을 보낸다. 고려인 4세인 이들도 19살이 넘으면 80년 전 증조부모가 강제이주 당한 그 나라로 돌아가야 하는 탓에 러시아어도 함께 배운다. 안산/김성광 기자 flysg2@hani.co.kr

‘재외동포법’ 시행령 제2조는 동포의 범위를 두 가지로 정한다. 첫번째는 대한민국 국적을 보유했던 자 또는 그 직계비속으로서 외국 국적을 취득한 자다. 여기엔 1948년 8월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전 국외로 이주한 자도 포함된다. 두번째는 ‘부모의 일방 또는 조부모의 일방이 대한민국의 국적을 보유하였던 자로서 외국 국적을 취득한 자’다. 뜯어보면 동포 3세까지 ‘동포’라는 것이다. 그러면, ‘동포 4세’는?

“나는 분명히 고려인인데, 왜 코리아에 살 수 없는 건가요? 언제까지 유령처럼 떠돌아다녀야 하나요?”

경기 안산시 단원구에 사는 18살 소녀 따냐는 고려인 4세다. 2014년 엄마(45)와 함께 우즈베키스탄에서 ‘할아버지의 나라’ 한국에 왔다. 말 한마디 못하는 낯선 땅이지만, 따냐는 우즈베키스탄에서처럼 된장찌개와 김치를 먹어도 놀림을 받지 않아 좋았다. 어디를 둘러봐도 자신과 꼭 닮은 검은 머리카락과 눈을 가진 사람들이 넘쳐나기에 행복했다. 따냐는 이제 피시방도 노래방도, 떡볶이와 쫄면의 맛에도 익숙해졌다.

하지만 만 19살이 되는 내년이 되면 다시 우즈베키스탄으로 돌아가야 한다. 고려인 3세인 엄마가 재외동포법에 의한 방문취업비자(H-2)로 한국에 왔기 때문이다. 엄마를 따라 동반비자로 입국한 따냐는 만 19살까지만 국내 체류가 허용된다. 현행법상 고려인 4세는 동포가 아니다. 그저 ‘검은 머리 외국인’일 뿐이다.

중앙아시아 경제 악화로 한국 온
고려인 급증해 4만여명 달해
공단지역서 저임금·장시간 노동
한국어 거의 못하고 빈곤한 삶

따냐가 대학을 가면 유학비자로 좀 더 국내에 머물 수 있다. 하지만, 공장에서 한 달 꼬박 일해도 150만원 안팎을 벌어 50만원에 가까운 원룸 월세를 내기도 버거운 엄마의 사정을 생각하면, 대학 진학은 하늘의 별 따기다. 게다가 한국말을 거의 하지 못해 학교 수업을 밥 먹듯 빼먹은 따냐에게 ‘대학생=한국 체류 가능’이란 조건은 낙타에게 바늘구멍에 들어가라는 말이나 다름없다.

어릴 적부터 카자흐스탄으로 돈을 벌러 나간 엄마와 짧게는 2~3년, 길게는 4~5년씩 떨어져 살아온 따냐는 이제는 하루하루가 두렵다. 엄마와의 생이별은 이골이 났지만, 모든 생활을 정리하고 떠나온 우즈베키스탄으로 돌아가면 당장 머물 곳조차 없다. 따냐가 말했다. “우즈베크에서는 이방인으로 살고, 한국에서는 외국인으로 살아야 하는 우리 처지를 어른들이 단 한 번만이라도 생각해주시면 안 될까요?”

따냐보다 4년 먼저 같은 일을 겪은 김이고르(22)는 3년째 3개월짜리 단기방문비자로 우즈베키스탄과 한국을 들락거린다. 비행기삯은 왕복 70만원 안팎이다. 단 한 번이라도 출입국 규정을 어기면 다시는 한국 땅을 못 밟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 이 때문에 한국에 있는 동안에는 비행기삯과 우즈베키스탄에서 머무를 여비를 마련하기 위해 밤마다 몰래 아르바이트를 한다. 방문비자로는 정상적인 취업을 할 수 없다. 이고르의 아버지(49)는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포함해 우리 세대는 중앙아시아를 떠돌았다. 그러나 엄연히 살만한 고국이 있는 자식 세대마저 정착할 수 없다면 도대체 우리는 누구냐”고 물었다.

■ 동포를 동포라 부르지 못하는 고려인 4세

고려인의 사전적 의미는 러시아를 비롯한 옛 소련 국가에 거주하면서 러시아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한민족 동포를 뜻한다. 블라디보스토크(연해주) 지방에 주로 거주하던 이들은 1937년 9월부터 시작된 스탈린의 고려인 강제 이주정책에 의해 러시아는 물론 카자흐스탄·우즈베키스탄·투르크메니스탄· 키르기스스탄·아제르바이잔·조지아(그루지야) 등으로 흩어졌다. 80년 전 일이다. 당시 강제이주 대상이던 조선인은 ‘고려인 1세대’가 됐고, 이들이 낳은 후손들은 고려인 2~3세를 이루며 옛 소련 땅에 정착했다.

그러나 1991년 소련 붕괴 이후 고려인 2~3세들은 새로운 노동시장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최근에는 루블화 가치 하락과 이에 맞물린 중앙아시아 국가의 경제 악화 영향으로 한국 땅을 밟는 고려인 후손들이 급속하게 늘고 있다. 국내 체류 고려인은 4만여명으로 추정되고, 이 가운데 1만2천여명이 반월·시화공단 등 중소형 공장이 몰려 있는 안산지역에 살고 있다.

흔히 카레이스키 또는 카레이츠라고 불리는 고려인 가운데 1∼3세는 1992년 제정·공포된 ‘재외동포의 출입국과 법적 지위에 관한 법률(약칭 재외동포법)’에 따라 재외동포의 지위를 얻었다. 이들은 방문 취업비자인 에이치(H)-2 비자를 얻거나 재외동포로서 일정 기간 한국 체류가 가능한 에프(F)-4 비자를 받아 입국해 살고 있다.

재외동포법 따라 1∼3세만 동포
4세는 외국인 ‘의료·교육 사각지대’
성인 되면 비자 만료돼 한국 떠나야
돌아갈 곳 없어 불안에 떨며 생활

그러나 대부분 19살 미만인 고려인 4세부터는 재외동포법상 ‘동포의 범위’에 해당하지 않는다. 한국에 오려면 고려인 2~3세에 해당하는 부모를 따라 동반 비자로 입국해야 한다. 적어도 법적으로 고려인 4세는 동포가 아니라 한국과는 아무런 인연이 없는 ‘외국인’에 해당한다. 따라서 이들은 만 19살이 되면 동반비자 기간이 만료돼 한국을 떠나야 한다. 사실상 강제 추방이자 가족과의 생이별이다. 3세와 4세를 왜 구별해야 하는지, 이들은 그 이유를 알지 못한다.

8천여명의 고려인이 사는 안산시 단원구 선부동 이른바 ‘땟골’ 지역에서 ‘고려인동포문화복지 지원센터’를 운영하는 김영숙(50) 사무국장은 “이상한 법 때문에 고려인 4세는 늘 불안에 떨며 생활하고 있다. 애초 살던 지역에서 사실상 모든 생활을 정리하고 귀국했기 때문에 이들은 아예 ‘돌아갈 곳’이 없는 경우도 허다하다”고 설명했다. 그는 “키르기스스탄 등 중앙아시아 국가를 떠돌다 14살이던 2013년 엄마를 따라 한국에 들어온 한 고려인 4세 소녀는 ‘법 때문에 내년이면 한국을 혼자 떠나야 한다’ 말을 듣고 ‘나는 틀림없는 고려인인데 왜 외국인이라고 하느냐’고 하소연했다”며 안타까워했다.

■ 고국에선 ‘외국인’ 외국에선 ‘이방인’

사정이 이렇다 보니 고려인 4세는 성장하는 게 두렵다. 지난달 20일 선부동 땟골의 한 골목에서 만난 이에리카(17)는 “엄마 아빠 모두 일터에 나갔다가 밤늦게 돌아온다. 나는 한국말을 몰라서 고등학교에 안 가고 그냥 집에 있다. 어른이 돼서 돈을 벌고 싶지만, 그러면 한국을 나가야 하니까 차라리 더는 나이를 먹지 않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현재 안산지역에 사는 19살 미만 고려인 4세는 500여명으로 추산된다. 이들은 갓난아기로 고국 땅에 들어와도 ‘외국인’이다. 의료는 물론 보육이나 교육에서도 사각지대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

고려인지원 사동센터를 운영중인 ‘너머’ 김승력(49) 이사의 말을 종합하면, 현재 한국에 거주하고 있는 고려인들의 처지는 다른 나라에서 살던 동포들과는 확연한 차이가 있다. 이들은 옛 소련 땅에서 살 때도 스스로 ‘고려사람’이라는 정체성과 자부심을 갖고 있었지만, 옛소련 정부가 한국어를 배우지 못하게 하는 정책을 펴서 우리말과 글을 전혀 모른다. 이때문에 고국에서도 소통이 안 되는 까닭에 일자리를 제대로 구하지 못하거나 저임금·장시간 노동밖에 하지 못한다. 김 이사는 또 현재 정부가 고려인 문제를 동포 문제로 다루지 않고 마치 다문화가정의 문제로 취급하려 하지만, 이마저 고려인들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동포 비자(F-4)로 입국하더라도 취업과 노동에 제약이 많고, 방문 취업비자(H-2)로 입국하면 노동이 가능하지만, 최장 4년10개월로 체류 기간이 제한돼 고려인들이 돈을 모으는 데는 한계가 있다. 그는 “경제력이 현저히 떨어지는 고려인 3세는 의무교육에 해당하는 초·중학교에 자녀들을 보내긴 하지만, 별도의 교육을 할 수가 없다. 이 때문에 고려인 4세 아이들 역시 한국어를 배우지 못하고, 고국에서마저 ‘외국인’으로 떠돌아 다시 ‘이방인’이 되는 악순환이 되풀이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에서 옛 소련지역 조사 담당을 한 이원영(한양대 글로벌문화연구원) 박사는 “독일도 우리처럼 러시아 일대에 많은 독일인이 거주하고 있다. 독일기본법에는 동포에 관한 규정을 두고 있는데, 혈통뿐만 아니라 문화·언어·교육의 동질성만 있으면 동포로 받아들여 재정착의 기회는 물론 교육 혜택까지 준다”고 설명했다. 이 박사는 “고려인 문제는 우리 역사의 문제임에도 우리 스스로 이를 외면하고 있다. 한마디로 다문화정책은 있어도 동포정책은 존재하지 않는다. 지금 고려인 4세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주권국가가 또다시 ‘유랑의 역사’를 만들고 슬픈 디아스포라(이산)를 되풀이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80년 전 스탈린에 의해 버림받고 강제로 뿔뿔이 흩어진 동포들의 후손을 21세기 대한민국이 다시 내쳐서는 안된다는 지적이다.

“4세에 동포자격 부여” 법안 발의
법무부도 “긍정적 의견 개진했다”
‘고려인 강제이주 80년’ 국민위 출범
대선 후보들에게 법개정 요구키로

지난달 20일 오후 안산시 단원구 초지동 글로벌다문화센터에서는 ‘고려인 강제이주 80년 국민위원회’(국민위원회)가 출범했다. 이날 출범식에는 제종길 안산시장, 강득구 경기도 연정부지사, 고려인 동포 등 100여명이 참석했다. 이 단체는 앞으로 상임위원회를 꾸려 제도 개선, 공동체 사업 등을 추진하고 현행 ‘고려인 동포 합법적 체류자격 취득 및 정착 지원을 위한 특별법(이하 고려인특별법)’의 지원 대상 확대를 위한 법 개정 등에 나설 계획이다.

김종천 국민위원회 사무국장은 “사할린 동포(강제징용) 문제는 일제가 저지른 범죄이며, 고려인 동포 문제는 일제와 옛 소련, 무능한 한국이 낳은 비극이다. 우리의 기억과 역사를 가로막고 있는 재외동포법 개정을 통해 고려인의 유랑을 이제 끝내야 한다. 이는 우리 모두의 숙제이자, 역사의 피해자에게 사과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고려인동포문화복지지원센터’ 김영숙 사무국장은 “앞으로 2~3년 안에 성인이 돼서 떠나온 나라로 돌아가야 하는 고려인 4세가 급증할 것이다. 이들을 무조건 추방하지 말고 고국에서 살 수 있도록 배려해야 한다. 재외동포법 개정이 어렵다면, 역사적 특성을 생각해 고려인 동포에게 영주권 기준이라도 완화해 줘야 한다”고 말했다.

국민위원회는 각 정당 대통령 후보에게 고려인특별법 개정을 요구할 방침이다. 국민위원회는 연간 10만원 이상의 회비를 내는 시민들을 전국에서 모집하고 고려인특별법 개정 간담회, 고려인 바로 알기 국민운동 등을 진행할 예정이다. 9월17일에는 안산에서 고려인대회를 열기로 했다.

고려인 동포 초등학생들이 25일 오후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사동 고려인지원센터 '너머'에서 한국어 공부를 하고 있다. 안산/김성광 기자 flysg2@hani.co.kr
고려인 동포 초등학생들이 25일 오후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사동 고려인지원센터 '너머'에서 한국어 공부를 하고 있다. 안산/김성광 기자 flysg2@hani.co.kr
정부 주무부처인 법무부도 고려인 4세에게 동포의 지위를 주는 문제에 전향적인 태도여서 새 정부 출범 뒤 국회와 논의만 잘 하면 이 문제가 풀릴 가능성도 작지 않은 것으로 점쳐진다. 법무부는 <한겨레>에 “현재 재외동포법·고려인특별법 개정안에 대한 의원입법이 다수 발의돼 관계부처의 의견을 수렴중”이라며 “재외동포법에 따라 동포자격이 인정되는 3세대 동포의 직계비속인 4세대 동포에 대해 동포자격을 부여하는 것에 대해 긍정적인 의견을 개진했다”고 밝혔다.

안산/김기성 기자 player009@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전국 많이 보는 기사

화염 속 52명 구한 베테랑 소방관…참사 막은 한마디 “창문 다 깨” 1.

화염 속 52명 구한 베테랑 소방관…참사 막은 한마디 “창문 다 깨”

515m 여주 남한강 ‘출렁다리’ 내년 5월 개통 2.

515m 여주 남한강 ‘출렁다리’ 내년 5월 개통

외국인 마을버스 운전기사 나오나…서울시, 인력 부족에 채용 추진 3.

외국인 마을버스 운전기사 나오나…서울시, 인력 부족에 채용 추진

아버지 무덤에 “증거물 묻어뒀다”는 명태균…검찰은 “화장했다” 4.

아버지 무덤에 “증거물 묻어뒀다”는 명태균…검찰은 “화장했다”

[영상] “지하철역 식사, 세 가정 근무”…필리핀 가사관리사 호소 5.

[영상] “지하철역 식사, 세 가정 근무”…필리핀 가사관리사 호소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