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일 유홍준 광화문대통령시대위원회 자문위원이 문재인 대통령의 대선 공약인 ‘대통령 집무실 광화문 이전’ 보류를 발표하며 덧붙인 한마디로 난데없는 ‘풍수논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풍수상의 불길한 점을 생각할 적에 (청와대를) 옮겨야 한다.” 유 위원의 이 말에 기자들이 “풍수상 불길한 점의 근거가 무엇인가”라고 묻자, 그는 근거는 대지 않은 채 “수많은 근거가 있다”라고만 답했습니다.
유 위원의 ‘풍수 발언’에 자유한국당은 ‘잠꼬대 같은 소리’ ‘뜬금없는 얘기’ 등의 표현을 써가며 발끈했습니다. 윤영석 수석대변인은 이틀 뒤 논평을 내어 “유 위원은 청와대 터가 풍수상 흉지라며 아무런 근거도 없는 잠꼬대 같은 소리로 국민 불안감을 조성하고 있다”며 “청와대는 5천년 민족사에 가장 풍요롭고 부강한 대한민국 국가운영의 중심 역할을 해왔다”고 날을 세웠습니다. 같은 당 이양수 원내대변인도 “우주탐사를 하는 첨단 과학의 시대에, 대통령 자문위원이 뜬금없는 비과학적인 얘기를 청와대 집무실 이전 문제와 연관 지어 설명했다”며 “지금까지 우리 대통령들이 하나같이 비극적으로 임기를 마친 것은 청와대의 풍수지리가 좋지 않아서가 아니다”라고 밝혔습니다.
역대 대통령들이 비극적으로 임기를 마치거나 측근 비리가 터질 때마다 ‘청와대 터가 문제다’라는 이야기가 돌았지만, ‘청와대 흉지론’을 공론화한 이는 풍수 전문가인 최창조 전 서울대 교수라고 일부 전문가들은 설명합니다. 최 전 교수는 1992년 <경향신문>에 연재한 ‘한국 풍수의 재발견’이라는 칼럼을 통해 “청와대 터는 살아 있는 사람들의 삶터가 아니라 죽은 영혼들의 영주처이거나 신의 거처”라고 주장했습니다.
물론, ‘땅이 뭔 잘못이냐’는 주장도 있습니다. 김두규 우석대 교수(교양학부)는 2017년 <월간조선> 12월호에 기고한 ‘우리 땅 우리 풍수’라는 글에서 “좌우 산들이 완벽하게 감싸주지 못해 청와대 터는 신들의 거처가 될 수 없다”라며 “청와대 흉지론도 더 이상 풍수라는 이유로 언급되지 않기를 바란다. 땅이 무슨 잘못인가?”라고 최 전 교수의 주장을 반박했습니다.
풍수는 오래된 유교 경전 가운데 하나인 ‘주역’에 뿌리를 둔 것으로 땅의 형태나 방위를 인간의 길흉화복과 연결해 설명하는 이론입니다. 다만, 이를 논리적·과학적으로 입증하기는 쉽지 않아 보입니다. 이 때문에 풍수가 좋다, 좋지 않다는 말 때문에 중요한 건물의 입지가 결정된다면 어떤 국민이 정부를 신뢰할 수 있을까요? “풍수가 좋지 않다”는 말 때문에 청와대를 옮기는 것도 바람직해 보이지 않습니다.
풍수 논쟁을 떠나 청와대 터는 역사적이나 민주주의 관점에서 적절하지 않다는 견해가 지배적입니다. 건축가 김인철 아르키움 대표는 “건축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는 ‘땅’이다. 특히 땅이 가진 상징적 의미가 중요한데, 지금 청와대 자리는 일제 강점기에 조선 총독 관저로 쓰인 곳이다. 대한민국의 상징과 같은 대통령이 일제 강점기 때 조선 총독 관저 자리에 머무는 것이 적당하지 않다”고 설명했습니다. 안창모 경기대 교수(건축대학원)도 “현재 청와대 위치는 일제강점기 총독 관저에서 시작됐다. 일제가 한민족을 지배하려는 입장에서 정한 위치”라고 지적했습니다. 조선 시대에 청와대 터는 경복궁의 후원 격으로 무관들의 훈련장이 있던 곳이다.
청와대가 경복궁과 북악산 사이의 폐쇄적인 곳에 있기 때문에 민주주의 시대에 맞지 않다는 지적도 나옵니다. 안창모 교수는 “민주공화국이라는 민주주의 시스템이 작동하는 나라에서 대통령이 도시의 가장 폐쇄적인 공간에 위치하는 것이 맞는가”라고 반문합니다. 청와대의 폐쇄적인 위치 그 자체가 ‘제왕적 대통령’의 권위를 상징한다는 것이 그의 설명입니다.
청와대의 폐쇄성을 극명하게 보여준 대통령이 바로 박근혜 전 대통령입니다. 청와대의 폐쇄적인 위치 덕에 박 전 대통령은 이른바 ‘비선 실세’인 최순실씨와 미용·의료 관계자를 은밀히 청와대로 불러들일 수 있었다는 지적이 나왔습니다. 폐쇄적인 곳이 위치한 구중궁궐 청와대는 그에게 최적화된 ‘시크릿 가든’이었던 셈입니다.
영국의 총리 관저, 미국의 백악관, 프랑스의 엘리제궁의 개방성은 청와대와 극명하게 대비됩니다. 영국 총리 관저는 도심 한복판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다우닝거리 10번지’라는 건물 주소 자체가 총리실을 상징합니다. 총리는 이 관저 앞에 나와서 국민을 상대로 성명이나 논평을 발표합니다. 미국도 비슷합니다. 미국 대통령의 관저이자 집무실인 백악관 앞으로는 워싱턴의 도심이 바로 펼쳐져 있습니다. 프랑스 대통령 관저인 엘리제궁도 파리 8구의 대로변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바로 건너편에는 결혼용품 전문점과 경매회사가 있을 정도로 시민들과 가까운 위치입니다.
건축 전문가들은 청와대가 열린 장소로 나와야 한다고 입을 모읍니다. 김인철 대표는 “지금 청와대 위치는 ‘닫힌’ 공간도 아닌 ‘갇힌’ 공간”이라며 “민주주의 정치 체제에서 청와대는 누가 드나드는지조차 공개될 수 있어야 한다. 열린 장소여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안창모 교수도 “우리는 한반도 해방 이후에 대통령이 시민들과 함께하는 공간을 공유해본 기억이 없다”며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대통령과 시민이 함께 소통하고 공유하는 공간이 필요하다”고 지적했습니다.
물론, 유홍준 위원이 밝힌 것처럼 비서실 등 부속시설 공간 확보에 대한 고민, 보안에 대한 고민을 배제할 순 없습니다. 특히, 분단된 상황에서 대통령을 향한 군사적 위협에 대한 대비도 필요해 보입니다. 김현수 단국대 교수(도시계획부동산학)는 “대통령이 광화문에 나오려면 비서실, 경호처 등 종합적인 이동이 필요한데 정부서울청사에 그런 공간이 부족할 것이다. 현실적인 고민이 필요하다”면서도 “쉽지는 않지만 청와대가 국민에게 개방적이 공간이 될 수 있도록 개선하는 논의는 필요하다”고 말했습니다.
한편에서는 청와대를 행정부가 3분의 2가량 이전한 세종시로 옮기면 이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주장도 나옵니다. 국민과의 소통뿐만 아니라 청와대 개방, 행정 효율, 균형 발전 등도 노릴 수 있다는 설명입니다. 이춘희 세종시장은 지난 10일 <기독교방송>(CBS)와의 인터뷰에서 “대통령 집무실과 청와대를 단계적으로 세종시로 이전해야 한다”며 “신축되는 정부세종청사 두 개 층 정도를 활용해 대통령 집무실을 설치한 뒤, 개헌을 통해 청와대까지 단계적으로 이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했습니다. 앞으로 청와대가 서울에서든 세종으로 옮기든 시민들 가까이로 갈 수 있을지 지켜볼 일입니다.
채윤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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