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5월21일 정오께 광주 금남로 전일빌딩 앞에서 계엄군 장갑차가 시민을 향해 기관총을 겨누고 있다. 이 장갑차는 오후 1시께 병사 1명을 치어 죽인 뒤 시민에게 기관총을 쐈다고 조사위는 설명했다. 5·18조사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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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체가 들린 상태로 입에서 피를 토하던 군인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8일 광주 북구의 한 사무실에서 <한겨레>와 만난 조아무개(64)씨는 43년 전인 1980년 5월21일 옛 전남도청 앞에서 본 계엄군의 처참한 모습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당시 그는 시위 행렬 맨 앞에서 시민들이 탄 장갑차를 운전하던 중이어서 사고 상황을 자세히 알 수 있었다고 했다. 21일 계엄군의 도청 앞 집단발포 직전 시위대 장갑차를 몰았던 운전자의 증언이 나온 건 처음이다.
조씨는 “시민과 계엄군이 대치하는 상황에서 장갑차 안에 있던 대학생 형들이 ‘밀어 밀어’라고 외쳤고, 옆에 있던 버스가 먼저 앞으로 나가자 장갑차를 5m 정도 전진시켰다. 장갑차가 무거워 빠른 속도는 아니었다”며 “우리 앞에 있던 계엄군 장갑차가 뒤로 후진하면서 장갑차 오른쪽(조씨 시야 기준)에 있던 병사가 하반신을 궤도에 깔렸다”고 기억했다.
조씨의 증언은 5월21일 도청 앞 집단발포가 ‘시위대 장갑차에 계엄군이 희생된 데 따른 자위권 발동 차원이었다’는 전두환씨 등의 주장이 거짓임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지만원씨 등 극우세력은 시민군이 군용 장갑차를 운전했다는 건 광주에 북한 특수군이 개입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당시 시민들은 전일빌딩 앞에서 버스와 트럭 등을 동원해 계엄군을 도청 쪽으로 밀어붙이던 상황이었다. 조씨가 탔던 장갑차는 아세아자동차(기아자동차의 전신) 공장에서 시민들이 가지고 나온 시엠(CM)6614 기종 차륜(바퀴)형 장갑차로, 계엄군이 탔던 엠(M)113, 125 기종의 궤도형 장갑차와는 외형부터 달랐다. 사고 전 이미 실탄을 분배했던 계엄군은 M16 소총과 장갑차에 장착된 캘리버50 기관총 등으로 시위대를 향해 발포했다.
1980년 5·18민주화운동 당시 시민군들이 탄 장갑차와 지프 차량이 광주 남구 양림동을 지나고 있다. 기무사 사진첩 갈무리
1980년 5월21일 정오께 광주 금남로 전일빌딩 앞에서 계엄군 장갑차가 시민을 향해 기관총을 겨누고 있다. 위쪽 장갑차는 오후 1시께 병사 1명을 치어 죽인 뒤 시민에게 기관총을 쐈다고 조사위는 설명했다. 5·18조사위 제공
조씨는 “사고가 나고 총알이 쏟아졌다”며 “무서운 마음에 분수대를 빙 돌아 전남대병원 쪽으로 도주해 이후 도청 앞 상황이 어떻게 됐는지 모른다”고 밝혔다.
1980년 조씨는 포니 왜건 차량으로 광천공단 공장에서 북구 운암동 영일식품 공장으로 포장지를 배송하는 일을 하며 지냈다. 1978년 운전면허를 딴 그는 화물차 기사로 일하고 싶어 빵봉지 배송으로 운전 경험을 쌓는 한편 8톤 트럭 조수 일도 함께 했다.
정확한 날짜(18일 추정)는 기억하지 못했지만 5·18민주화운동 때 영일식품에서 파고다빵을 실어 도청 앞 전투경찰에게 가져다준 일을 계기로 시위에 참여했다.
조씨는 “빵을 주고 나오는데 전경들이 최루탄 상자를 주면서 ‘지금 후퇴해야 하는데 빵공장이 본부와 가까우니 시민들 몰래 갖다 놓으면 나중에 가지러 가겠다’고 했다”며 “광주 천변 쪽으로 나왔는데 군인들이 차를 붙잡고 최루탄을 가리키며 ‘훔쳤느냐’면서 마구 때렸다. 피범벅이 된 뒤에야 간신히 상황을 설명하고 자리를 피할 수 있었다”고 했다. 조씨는 포니 차량을 화정동 사장 집에 가져다 놓고 무단결근한 뒤 분통이 터져 시위에 동참했다고 한다.
그는 “상무관과 동부경찰서 사잇길에 갔는데 장갑차가 한대 서 있고 대학생 형들이 운전할 사람을 찾고 있었다”며 “나는 8t 트럭을 몰아봤기 때문에 장갑차를 운전해보겠다고 했다”고 회상했다. 장갑차 운전석은 변속레버 모양새와 위치만 달랐을 뿐 일반 트럭과 비슷했다고 한다.
5·18민주화운동 당시 옛 전남도청 집단발포 현장에 있었던 시민군 조아무개씨가 당시 자신이 탔던 것으로 추정되는 장갑차 사진을 가리키고 있다. 김용희 기자 kimyh@hani.co.kr
5·18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들이 무한궤도형 장갑차를 동원해 버스에 탄 시민들을 연행하고 있다. 기무사 사진첩 갈무리
조씨는 “시야가 좁은 것을 빼곤 장갑차 운전도 할 만했다”며 “주로 화순이나 광주교도소, 송암동 등 외곽으로 다니며 민간인 부상자나 주검을 실어 도청 쪽으로 옮기는 일을 했다”고 설명했다. 한번에 2~5명씩 수차례 이송을 반복했다. 차량 내부가 비좁아 주검을 위아래로 포개 실은 적도 있어 아직도 망자에게 미안함을 느낀다고 했다.
후송을 갈 때마다 장갑차에 총알이 부딪치는 소리가 쉴 새 없이 났다. 무서워서 내리겠다고 하자 옆자리에 타고 있던 광수(또는 광희)라는 이름의 2살 위 대학생은 ‘네가 없으면 누가 장갑차를 운전하느냐’고 만류했다. 도청에 잠시 내려 화장실을 갈 때도 대학생 시민군들은 조씨가 사라질까 봐 항상 붙어 있었다.
송암동 쪽에서 유달리 사격을 많이 받은 직후 조씨는 광주기독병원에 환자를 내려준 뒤 장갑차를 세우고 뛰쳐나왔다. 이후 계엄군에게 붙잡혀 상무대 영창으로 끌려갔지만 연행 과정에서 손목 관절이 빠져 치료를 요구하자 그냥 풀려났다고 한다.
현재 작은 사업체를 운영하는 조씨는 혹시나 모를 불이익을 우려해 40여년 동안 시위 참여 사실을 숨기고 살았다고 했다. 하지만 극우세력이 시민군 장갑차를 북한 특수군 침투 근거로 삼자 2020년 5·18기념재단에 연락해 장갑차 운전에 대해 증언했다.
조씨는 “차륜형 장갑차는 트럭을 몰 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운전할 수 있다”며 “진실에 대한 왜곡이 멈출 때까지 5·18은 끝나지 않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차종수 5·18기념재단 기록진실부장은 “전두환씨는 회고록에서 시민군 장갑차가 돌진해 병사를 치어 죽여 발포했다는 논리를 펴 5월단체와 법정 다툼을 벌였고 현재 대법원 계류 중”이라며 “계엄군의 자위권 논리를 깨뜨릴 수 있는 의미 있는 증언”이라고 말했다.
1980년 5월21일 계엄군이 옛 전남도청 앞 집단발포 직전 시민들과 대치하는 모습. 기무사 사진첩 갈무리
김용희 기자
kimyh@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