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시립미술관 초대전 여는 박소빈 작가
“청룡의 해를 맞아 새로운 신화가 광주에서 시작돼 세계로 뻗어갔으면 좋겠어요.”
‘용의 작가’로 불리는 박소빈(52) 작가는 지난 12일 광주시립미술관 전시실 3층 들머리에 걸린 신작 ‘용의 부활-무등의 신화’ 앞에서 환하게 웃었다. 그는 광주시립미술관에서 초대전 ‘박소빈: 용의 신화, 무한한 사랑’을 3월24일까지 연다. 전시된 그림 속 청룡은 광주 5·18민주광장에서 꿈틀거리다가 무등산을 향해 승천한다. 용 몸체의 흑색 머릿결엔 1980년 오월 시민집회 풍경이 원형으로 똬리를 틀고 있다. 박 작가는 “무등산 줄기에서 시작된 민주주의 영혼이 광주에서 부활하길 바란다”고 했다.
30여 점의 대형 작품 중 눈에 띄는 작품은 17m 길이의 ‘부석사 설화-새로운 신화창조’다. 신라 고승 의상과 선묘 여인의 사랑을 그린 작품이다. 2017년 중국 베이징 진르(금일)미술관 현장에서 49일간 직접 연필을 깍아 가면서 용과 여인의 애틋한 사랑을 그리는 현장 퍼포먼스를 통해 완성한 작품이다. 박 작가는 “관객들과 직접 만나 작품 제작 과정을 보여주고 싶었다. 진르미술관 현장 퍼포먼스 이후 처음으로 이 작품을 공개하게 돼 기쁘다”고 말했다.
화엄사 그림서 영감받은 ‘용의 작가’ 베이징서 49일간 퍼포먼스로 완성한 ‘부석사 설화…’ 연필화 작품 첫 공개 코로나19때 지독한 격리로 주술하듯 소통·관계 기원한 ‘문자화’도 선보여
2월엔 항저우 충더미술관서 개인전 4~11월 베니스서 전시 이어갈 예정
2011년 광주시립미술관 추천으로 베이징 레지던시 작가로 갔던 그는 베이징의 ‘포스 갤러리’와 인연을 맺어 5년 전속 작가로 활동했다. 박 작가는 “지금은 중국 대학 2곳에서 실기 강의를 하며 뉴욕과 유럽 등을 오가며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전시장엔 20대 때 그렸던 몇점의 유화들도 전시됐다. ‘21살, 시대의 자화상’(1993)은 알몸을 ‘터치’한 붓끝의 예리함과 그림 속 여성의 눈빛이 강렬했다. 그 해 그렸던 ‘포옹’은 광주미술인공동체가 5월 금남로 거리 전시회 때 선보였던 작품이다. 박 작가는 “당시 5·18과 광주정신을 해부학적으로 풀어 영혼을 들추고 싶었다. 알몸을 거울에 비추는 것처럼 사실적으로 작업했다”고 말했다. 이 작품들은 격정적이었던 당시 민중 미술계에선 낯선 시도로 여겨졌다.
그러다가 박 작가는 연필을 만났다. 디지털 시대에 가장 아날로그적인 도구를 선택할 수 있었던 것은 ‘사유의 힘’이었다. 조선대 대학원에서 동양미술사를 공부했던 그는 “나의 것이 무엇인지를 보이지 않는 작업을 하고 싶었다”고 한다. 동양적인 미학을 찾아가던 길 위에서 만난 게 연필이었다. 한국수묵화의 담백함을 표현하는 수단이었던 먹처럼 연필의 단색화에 끌렸다. 그림의 소재도 단순해졌다. 대학 4학년 때 전남 구례 화엄사에서 대웅전을 타고 오르는 용 그림에서 영감을 받았던 그는 그림의 소재로 용을 선택했다.
박 작가의 작품 세계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이는 스승 고 원동석 목포대 미술학과 교수였다. 원 교수는 “한국 근현대 미술의 외세 추종주의”를 비판했던 한국민중미술의 대표적인 이론가이자 평론가였다. 박 작가는 “교수님을 만나면서 예술을 보는 눈이 바뀌었다. 나와 지역, 한국적인 것으로부터 출발해야 세계로 나갈 수 있다는 것을 배웠다”고 말했다. 원 교수는 제자의 연필화 작업에 관해 “마치 불화를 제작하는 화공의 공력과도 같은 진지한 자세로, 독자적인 세계를 연필화로 개척했다”고 평가했다.
박 작가의 연필 드로잉은 국내뿐 아니라 국외에서도 주목을 받았다. 미국 뉴욕시립대 탈리아 브라초풀로스 교수는 2006년 광주비엔날레에 왔다가 시립미술관 입주작가 작업실에서 박 작가의 그림을 봤다. 미술평론가이자 큐레이터이기도 한 브라초풀로스는 뉴욕 텐리 갤러리(2007)와 첼시 뮤지엄(2009)에 박 작가를 초대했다. 다음 달 중국 항저우 충더(숭덕)미술관에서 2층 전체 전시 공간을 활용해 개인전을 연다. 4월부터 11월까지 제60회 베니스비엔날레가 열리는 기간에 베니스 산비달아트센터 갤러리에서 ‘용과 여인’의 세계를 그린 대표작 등을 전시한다.
박 작가는 늘 새로운 것을 찾아다닌다. 유화에 이어 연필화를 선보인 그는 ‘문자화’를 발굴했다. 이번 전시회에도 ‘문자 드로잉’ 작품과 그 과정을 보여주는 오브제를 선보인다. 박 작가는 “코로나19 시기의 지독한 격리 경험은 마치 샤먼이 주술을 하듯이 기원문을 써가게 했다. 문자 그림을 통해 소통과 관계의 중요성을 말하고 싶다”고 했다.
박 작가의 30년 작품세계를 돌아보는 자리가 마련된다. 광주시립미술관(관장 김준기)은 오는 18일 오후 2시 박 작가 작품이 중국 및 서양의 현대미술에서 차지한 위치 등에 관해 이야기하는 심포지움을 연다. 리처드 바인 ‘아트 인 아메리카’ 전 편집장, 탈리아 브라초풀로스 교수, 주치(朱基) 중국 평론가 겸 기획자, 박구용 전남대 교수(철학과), 박천남 독립큐레이터 등이 발표자로 참여한다.
정대하 기자 daeha@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