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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이승만 맞선 ‘친미보수’ 장리욱의 삶 새로 알리고 싶어요”

등록 2023-02-14 18:41수정 2023-02-14 21:50

[짬] 미 뉴저지주립 럿거스대 유영미 교수
유영미 럿거스대 교수. 유 교수 제공
유영미 럿거스대 교수. 유 교수 제공

“제 수업은 모두 첫 3시간은 한글을 가르칩니다. ‘시조에서 케이팝까지’ 등 영어로 한국 문화를 가르치는 수업도 그렇게 하죠. 세 시간만 투자해 한국 가면 간판 정도는 읽을 수 있다고 알려주면 학생들이 좋아해요. 언어의 뒷받침 없는 한국학은 모래성입니다. 최근 한국학이 미국에서 성장하는 것도 한국어 교육에서 시작했죠.”

유영미 미 뉴저지주립 럿거스대 동양학과 한국학 교수는 미국 대학에서 35년 넘게 한국어를 가르치고 있다. 서부 명문 스탠퍼드대 대학원 시절인 1985년 무렵 이 대학에 한국어 프로그램을 만들어 10년 이상 가르치다 1996년에 럿거스대학으로 옮겼다. 1990년 언어학으로 스탠퍼드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그는 이 대학 한국어 프로그램 전임 교수로 강단에 서다 “한국학을 키우겠다는 의지를 보고” 동부 럿거스대를 선택했단다.

그가 최근 도산 안창호가 설립한 흥사단 지도자이자 이승만 독재에도 맞섰던 장리욱(1895~1983) 전 서울대 총장이 1975년에 낸 회고록을 <백 년 전의 꿈-다시 읽는 장리욱>(서울대출판문화원)이란 제목으로 다시 펴냈다. 이 작업에는 장리욱 외손인 김미혜 전 웨스트민스터 콰이어 칼리지 도서관장도 함께했다.

지난 9일(현지시각) 뉴저지주 프린스턴시에 사는 유 교수를 전화로 만났다.

“장리욱 선생은 민족독립과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 때문에 투옥과 해직을 당하면서도 흔들림 없이 꼿꼿한 자세를 유지했다는 점에서 나에게 큰 감명을 주었다.” 경제학자인 고 변형윤 서울대 교수가 저서 <학현일지>(2019)에 쓴 내용이다.

1917년 미국에서 도산을 만나 흥사단에 입단한 장리욱은 컬럼비아대학에서 교육학 석사 학위를 따고 1928년에 미 북장로회 교단이 세운 평북 선천 신성학교 교장을 맡아 귀국했다. 그는 교장 재임 9년 만인 1937년에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구속돼 1년 이상 옥고를 치렀고 교장 자리도 내놓아야 했다. 해방 뒤 월남해 미 군정에서 서울대 사범대 학장과 제 3대 서울대 총장을 지낸 그는 흥사단을 좋지 않게 보았던 이승만 정권이 들어선 뒤 어려운 세월을 보내야 했다. 이승만 대통령 취임 뒤 바로 총장을 물러나야 했고 한국전쟁 발발 첫해 미국 요청으로 도일해 문익환, 정경모 등과 함께 북한 문서 번역과 대북 방송에 힘을 보탰으나 휴전 뒤에도 5년 동안 귀국하지 못했단다. 장리욱을 야당 쪽 인물로 분류한 이승만 정권의 견제가 심하게 작용한 탓이었다. 4·19 뒤 장면 정권 때는 주미대사로 공직을 맡았지만 5·16 쿠데타로 7개월 만에 물러나야 했다. 그는 쿠데타 하루 뒤 기자회견을 열어 쿠데타 반대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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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년 전의 꿈> 표지.

회고록에는 저자가 서울대 사범대학장으로 겪은 국립서울대학안(국대안) 사태를 비롯해 1945~1961년 현대사의 주요 사건을 되짚는 내용들이 많다. 국대안 분규 중 시행한 첫 서울대 학생 등록 때 미 군정 피틴저 학무부장이 군복에 유난히 큰 권총을 차고 등록장을 순시했다거나 모든 교수에게 ‘당신네 척추 속에는 진흙(mud)만 가득 차 있다’는 모욕적인 언사가 담긴 공개서한을 보냈다는 내용 등이 그렇다. 주미대사로 가기 전 따로 만난 장면 총리가 기대와 달리 외교 지침에 대한 말은 별로 하지 않고 워싱턴의 특정 교포와 상종하지 말라며 영어로 ‘나는 그를 싫어한다’고 말했다는 회고도 눈길을 끈다. 1936년 도산의 재정 지원으로 장리욱이 일본 농촌 지역을 3주 견학했다는 일화에서는 이상촌 건설에 대한 도산의 열정이 얼마나 컸는지 엿볼 수 있다.

유 교수는 코로나로 집에서 “공포에 가득 찬 감옥 생활”을 하던 2020년에 이웃인 김미혜 전 관장에게 타자기로 쓴 쿠데타 반대 성명 원본 등 미발간 자료가 있다는 말을 듣고 이번 출간 작업에 나섰단다. 국한문 혼용인 1975년 회고록을 다듬고 주해도 곁들이고 장리욱의 해방 후 교육활동을 살피는 정병준 이화여대 교수의 논문도 새로 받아 실었다.

장리욱을 지금 왜 기억해야 하느냐는 질문에 유 교수는 “훌륭한 책이나 사람은 유효기간이 없는 것 같아요. 변형윤 교수도 장리욱 회고록에 나타난 ‘흔들림 없는 꼿꼿한 자세’에서 위안과 영감을 받았다고 했죠. 글을 통한 이런 반향이 21세기에도 이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책을 냈죠.”

‘친미보수’ 장리욱은 왜 ‘친미보수’ 정권에서 어려운 시간을 보냈을까? “그분은 근본주의적 흑백논리가 아니라 사람의 논리에 충실했어요. 북한 출신 기독교인이고 미국 유학파라 이승만과 결이 같아 보이지만 실제로는 휴머니스트였죠. 기독교에 편향되지도, 미국 교육 방식에 맹종하지도, 권력지향적이지도 않았어요. 관운이 몹시 짧았던 것도 시류에 영합하지 않아서죠. (장리욱은) 평소 ‘번뇌나 희열도 알고 보면 다른 것이 없다’며 담담하고 의연한 삶의 자세를 보이면서도 (박정희 시절) 소신껏 <사상계>에 글을 발표해 권력의 남용을 비판했죠.”

‘백년 전의 꿈-다시 읽는 장리욱’ 펴내
기독교·미국 유학·미군사령부 근무
흥사단 활동·주미대사·서울대 총장
“시류 따르지 않고 ‘독재 반대’ 꼿꼿”

스탠퍼드대 때부터 35년 한국학 강의
“최근들어 중국·일본어 수강생 추월”

유 교수는 4년 전에 고 양상현 교수와 함께 <은자의 나라 한국>(1882)의 저자 윌리엄 엘리엇 그리피스가 럿거스대에 기증한 한국 관련 자료 중 사진 530여장을 정리한 <그리피스 컬렉션의 한국 사진>(눈빛)을 출간해 주목을 받기도 했다. 올해는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의 지원을 받아 ‘그리피스 컬렉션’ 중 그리피스가 호러스 알렌, 헨리 아펜젤러, 호머 헐버트 등 한국에서 활동하던 선교사와 이승만, 서재필, 이광수 등 한국인과 이토 히로부미 등 일본인에게 받은 편지를 묶어 영문판으로 낼 계획이란다.

“편지 중 80%가 손글씨입니다. 일일이 타이프를 쳐서 정리하고 주해를 다니 모두 36만 단어나 되더군요. 이 가운데 3분의 1은 책으로, 나머지는 디지털 아카이브로 발행합니다.” 내용을 궁금해하니 이렇게 답했다. “그 시절 대부분 선교사는 일본이 문명국이라 한국을 지배하는 것은 어쩔 수 없다는 투였지만 오로지 헐버트만 일본의 한국 지배는 잘못된 것이라고 하더군요. 그는 한국말을 잘했기 때문에 한국 사회와 문화에 대한 이해도 깊었어요.”

‘물론 나는 한국이 완전히 끝났다고 믿지 않습니다. 한국은 일본과는 정반대의 방향으로 서구문명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한국의 결정이 국가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잘한 것으로 판정이 날지 확실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한국 정치의 미래가 어떻게 결정되든 나는 한국이 일본보다는 나은 선택을 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유 교수가 헐버트의 편지 중 큰 감동을 받았다는 1911년 1월2일치 내용이다.

그는 올해부터 럿거스대학 출판부에서 한국 출간 도서 중 매년 3권을 선별해 영어로 번역해 낼 예정이다. 이 ‘현대 한국 도서 시리즈’ 첫 권은 <윤동주 평전>(송우혜 저)이며, <가재미>(문태준), <군인이 천사가 되기를 바란 적 있는가>(김숨), <내 남편 윤이상>(이수자), <기형도 시집>도 목록에 있다.

그가 96년에 럿거스대학 첫 한국학 교수로 부임할 때 중국학과 일본학은 이미 교수가 4~5명이었단다. 지금은 중국 7명, 한국과 일본이 각각 5명이다. “매년 럿거스대 한국학 과목 강좌에 등록하는 학생이 약 700여 명으로 3년 전에 중국을, 2년 전에는 일본을 넘어섰어요. 미국 대학 전체로도 지난 몇 년 외국어 수강생은 크게 줄었지만 유독 한국어는 빠르게 성장하고 있죠.” 그는 미국과 캐나다 대학의 한국어 교수가 속한 북미한국어교육학회(AATK) 회원도 자신이 회장이던 15년 전쯤에는 100명이었지만 지금은 350명이라고도 했다. “올가을 학기를 앞두고도 10명 정도의 한국어 교수 채용 공고가 나왔더군요.”

럿거스대학의 한국어 전공과 부전공 학생은 각각 15명과 55명이지만 한인 동포는 소수란다. “한국어 수강생이 약 20년 전만 해도 한인이 절반 이상이었지만 지금은 10~20%입니다.” 그는 “한류와 세계 무대에서 한국의 위상이 올라가면서 한국어를 배우는 학생 수가 늘어난 것은 좋은 일”이라면서 이런 말도 했다. “영어권 학생들에게 한국어는 배우기 어려운 언어입니다. 초급 과정에 몰리는 학생들을 얼마나 많이 고급 한국어 수업까지 끌어올리느냐가 과제이죠. 학생들은 자신의 한국어 실력이 느는 것을 봐야 학습에 재미를 느끼거든요. 이 때문에 힘들지만 재미있는 한국어 커리큘럼을 짜느라 고심을 많이 합니다.”

그가 2년 전 개설한 한영통번역인증과정이나 한국문화 교육 프로그램으로 마련한 시조 강좌도 이런 노력의 하나다. “직업으로 연결될 수 있다고 생각해선지 통번역인증과정 인기가 좋아요. 작년에 6명, 올해 19명이 과정을 마칩니다. 이 과정은 한인 학생이 60% 정도 됩니다.”

서울대 영문과를 졸업한 79년에 미국 유학을 떠난 유 교수의 어머니는 한때 서울 여의도 공원 세종대왕 동상 앞에서 “한글을 발명해 우리 딸이 직업을 갖게 되었다”며 감사의 절을 올렸단다. 그의 언니(유영난)와 조카(김지영)도 한국 문학을 영어로 옮기는 저명한 번역가이다. “국어교사를 하신 어머니가 기억력이 뛰어나고 말씀도 청산유수로 잘하셨어요. 제가 어릴 때 밤에 정전이 되면 이부자리에 자녀들을 눕히고 시조와 현대시를 외우게 하셨어요.”

그는 30년 이상 한국어를 연구한 전문가이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한국어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물었다. “한국이 세계에 내놓은 문화업적 중 하나만 고르라면 세종대왕의 훈민정음 창제입니다. 한글은 한국어에 딱 맞는 문자이죠. 만약 로마자로 한국어를 가르쳐야 한다면 너무 괴로울 것 같아요. 언어를 받아들여야 그 문화를 제대로 받아들입니다. 방탄소년단의 한국어 가사를 외국인들이 열정적으로 부르는 게 의미가 큰 것도 그래서죠.”

강성만 선임기자 sungm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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