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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옛사람의 삶 읽기, 결국 나를 찾는 여정”

등록 2007-03-01 23:23수정 2007-03-01 23:26

문밖을 나서니 갈 곳이 없구나
문밖을 나서니 갈 곳이 없구나
책·인터뷰 / ‘문밖을 나서니 갈 곳이 없구나’ 펴낸 최기숙 교수

“전기를 쓴다면 누구를 쓰고 싶으세요?” 수인사가 끝나자마자 불쑥 질문이다. 전기는 누군가의 삶에 대한 기술. 누구를 선택하는가에 세계관과 인생관, 적어도 관심사가 들어 있다. 그의 질문은 상대방에 대한 탐색이라기보다 ‘나 이런 사람이오’를 표현하는 방식이다.

〈문밖을 나서니 갈 곳이 없구나〉(서해문집, 1만1900원), ‘거지에서 기생까지, 조선시대 마이너리티의 초상’이란 부제가 달린 책을 쓴, 대학에서 연구하고 가르치는 최기숙 교수(연세대 학부대학, 국어국문학 전공)다. 거리낌없음은 자신감의 또다른 표현.

조선 후기 18, 19세기 스물다섯 명의 삶에 대한 기록인 ‘전(傳)’을 우리 말로 옮기고 자기 견해를 붙였다. 권세가(김조순, 홍양호), 서얼(성대중, 이덕무), 중인(조희룡, 유재건), 평민(정래교, 김희령) 등 원기술자가 다양하고 기술 대상 역시 기존의 오리지널 충효열 인물에서 한참 벗어나 있어 조선 후기 신분제의 흐트러짐을 반영하고 있다.

떠돌이 연주자로서 그늘진 곳에서 도를 키우던 예인, 천한 기생이지만 고귀한 절의와 신의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버린 여인, 독학으로 의술을 익혀 어의가 된 사람, 일본에까지 명망을 떨친 천재 요절시인, 말 못하는 벙어리지만 칼 만드는 솜씨가 빼어난 장인 등 가문이나 벼슬과 무관하게 가치있는 삶을 산 인물들, 또는 사도세자의 은혜를 입고 출궁해 두문불출 생을 마친 궁녀, 시를 주고받은 유생이 죽자 남편의 예로 수절한 내시집 여종, 어른 유괴범을 부려 백두산 유람을 한 어린이 등 자신의 입과 글을 갖지 못한 인물들이다.

“지식만으로 해결되지 않는 게 있었어요. 나는 무엇인가, 가치있는 삶은 무엇인가 하는 고민이죠. 통째 기술된 옛사람의 삶에서 찾을 수는 없을까, 그것이 전 읽기의 시작이었죠.”

각종 개인문집 170여권에서 개인전기를 찾아 읽었다. 가장 큰 충격은 한 사람의 생을 단 두 쪽 내외로 정리했다는 것. 한 권의 책으로도 모자라는 게 지금의 현실인데,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가? 기술 방식에 머물던 눈은 기술 대상, 기술자의 시선 등으로 넓혀나갔다. 그 결과 조선 후기의 전들이 대상자 이름만 바꾸면 똑같았던 기존 양식에서 벗어나 생동감을 띠게 되었고, 현달한 자가 아닌 이웃에서 쉽게 볼 수 있는 필부필부로 대상이 바뀌고, 호기심이나 동정에서가 아니라 그들의 삶에 공감해서 기술한 게 역력했다.

기생·궁녀·벙어리·떠돌이 등
조선시대 소수자 25명의 삶 재구성
“책 쓰면서 따뜻해지고 자신에 대한 애정도 생겨”

최기숙 교수
최기숙 교수
“조선 후기는 중인층이 문화·경제적으로 성장하면서 인간은 품부대로 산다는 천기론적 해석이 가능해졌어요. 그러면서 신분은 낮지만 교양적이고 충효열을 보여주는 인물들에게 시선이 간 것이죠.”

최 교수는 소수의 소외자 혹은 나와 다른 자의 삶과 대화가 가능할 때 사회는 건강하다면서 이 책에서 보여주는 것처럼 거지나 기생, 궁녀, 어린이의 말문을 대신해 준 조선시대 사회는 지금보다 건강했는지 모른다고 말했다.

“문학은 제도와 이념의 폭력에 짓눌린 한을 풀어내는 역할을 합니다. 공포영화의 주인공이 자살한 여성인 점을 생각하면 쉬워요. 원귀들은 억울함을 들어주고 이해해주면 사라져요. 심지어 복까지 빌어주지요.”

전은 주인공을 드러내기 위해 반주인공을 설정하는 게 특징. 여기에 주인공에 비껴 공감하는 당대의 원기술자, 그 위에 현대 여성의 눈을 가진 최 교수가 서 있는 중층 구조다. 그는 주인공과 기술자한테 무척 기울어져 있다. 줌 속 촉촉한 땀이 느껴질 정도. 독자는 세 시선을 모두 엿보는 셈이다. 지은이의 시선과 해설 일부에 딴죽을 걸자, 당대 원기술자들 역시 한 사람을 두고 달리 기술한 것처럼 전을 읽는 방식은 열려 있다고 말했다. 지켜볼 수 있는 네번째 시선을 만나서 무척 재밌다는 표정.

“책을 쓰면서 따뜻해졌어요. 삶이 견딜 수 없이 사소하지만 오래된 빛의 넋이 살아있는 듯한 느낌이 들면서 저에 대한 애정이 생겼어요. 독자들이 그것을 함께 느꼈으면 좋겠어요.”

글·사진 임종업 선임기자 blitz@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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