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하기’ 위한 100가지 개념
〈사고의 용어사전〉
<사고의 용어사전>의 지은이 나카야마 겐은 ‘철학하는 행위’란 “낡은 개념들을 위해 새로운 무대를 만들어주는 것”이라고 규정했다. 지은이에게 중요한 것은, ‘철학’이 아닌 ‘철학하는 행위’다. 책 제목에 명사 ‘사상’이 아닌 ‘사고(하다)’라는 동사의 의미를 살린 것과 같은 취지다. 그러므로 철학이란 고정불변의 보편이 아니다. 당연히 초월적이지도 않다. 역사와 삶의 교직 속에 늘 새롭게 재구성·탄생해야 할 무엇이다.
지은이의 이런 ‘철학하기’를 위해 모두 100개의 개념이 ‘새로운 무대’에 올랐다. ‘놀이’에서 시작해 ‘논리’로 끝난다. 지은이는 순서대로 읽을 것을 권한다. 사전의 형식을 띠고 있지만, 내적 체계를 갖추고 있다는 것이다. 대체로 한 개념에 5쪽을 할애했다. 길지 않은 풀이지만, 쉽지 않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서 헤겔, 니체, 비트겐슈타인, 바타유, 들뢰즈 등 이름짜한 철학자들이 종횡무진으로 등장한다. 하지만 시험공부하듯 외우려 들지 않는다면, 따라가기 어려울 것도 없다.
요즘 공자의 ‘정명’(正名)이 최시중 방송통신위원장 탓에 21세기 한국 사회에서 오명(汚名)에 시달리고 있다. 이 책을 읽으며 어찌하는 게 ‘정명’인지 생각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터. 이 대목에서 질문 하나. ‘positivism’의 한국말은? ‘실증주의’(實證主義). 틀리지도 맞지도 않은 대답이다. 한국에서도 그리 쓰고 있지만, 한국인이 아닌 일본인이 고민 끝에 고안해낸 번역어이기 때문이다. ‘positivism’을 한국의 자연과 역사, 삶의 관계의 체로 걸러낸다면, 어떤 한국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박양순 옮김/북바이북·2만8000원. 이제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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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 자본가들의 권력 네트워크
〈세계를 움직이는 인맥〉
오일쇼크, 1997년 경제위기, 그리고 최근의 미국발 금융공황까지 겪고 보니 시장엔 ‘보이지 않는 손’만 작동하고 있는 게 아님이 더욱 분명해졌다.
일본 소에지마 국가전략연구소 연구원 나카타 야스히코가 쓴 <세계를 움직이는 인맥>은 세계의 정치·경제·금융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실로 세계를 움직이는 사람들의 최근 동향과 그들의 네트워크를 자세히 파헤친 책이다.
지은이는 치밀한 자료 추적을 통해 소수 손꼽히는 자본가들이 주도하는 내밀한 인맥의 세계 ‘스몰 월드’가 지닌 권력의 실체를 일목요연하게 드러낸다. 인맥은 부(돈)만으로는 만들어지지 않는다. 정치 사회적 영향력도 확보해야 하고 거기엔 그런 역량을 지닌 핵심인물들이 주도적 구실을 한다. 책은 루이 뷔통 그룹 이사진의 인맥에서 출발해 유럽 최대 에너지 기업 수에즈, 멀게는 캐나다의 금융산업에까지 미치는 영향을 보여주면서 ‘스몰 월드’가 단지 그들만의 세상이 아닌 그야말로 세계를 움직이는 권력의 원천임을 보여준다. 유럽·러시아 등에서 출발해 월가로 나아갔지만 반대의 과정을 거쳤어도 결국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월가를 움직여온 록펠러가와 수에즈 경영진이 유럽연합을 기획한 빌더버그 모임에서 만나는 식이니 말이다. 유대계 거대 자본 네트워크 로스차일드가가 <포브스>의 세계 부호 리스트에 거의 등장하지 않는 이유, 좀체 파악하기 어려운 이슬람 자본과 화교계 자본 네트워크까지 살폈다. 한국 또한 이방지대가 아닐 것이다. 한승동 옮김/시대의창·1만4500원. 남은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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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문화 물들인 ‘경제제일주의’
〈무례한 복음〉
문화평론가가 다루는 소재는 우리의 일상이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개인의 삶과 사회의 변천을 끊임없이 관찰하고 해석하는 게 일이다. 그들의 소재는 그래서 낯설지 않다. 문화평론가의 작업이 절실한 세상이다. 변화의 속도가 무서운 까닭이다. 이택광 경희대 교수의 <무례한 복음>이 다루는 시기(2008~2009)가 특히 그렇다. 까마득해 보이는 일들이, 따져 보면 얼마 전이다. 매일같이 광화문 일대를 가득 메우던 촛불의 인파는 불과 1년 전 일이다. 박태환이 올림픽에서 우승한 것은 8월, 한국 야구 대표팀은 9전 전승으로 금메달을 땄다. 지난해 여름 국방부의 ‘불온서적 목록’이 고스란히 ‘베스트셀러’가 됐고, ‘간첩’ 원정화가 붙잡혔다. 인터넷 논객 ‘미네르바’는 올 초 체포됐다가 석 달 만에 풀려났다. ‘강마에’라는 괴팍한 음악가와 ‘여인 신윤복’ 논란도 겪었다.
지난해 초 남대문에 불이 났다. 비슷한 시기 이명박 정부가 출범했다. 여전히 남대문은 공사중이고, 여전히 대통령은 이명박이다. 호랑이를 탄 듯한 숨가쁜 변화 속에서도 바뀌지 않는 것들이 있다. 정신을 차릴 수 있을 법도 하다. 지난 2년여 대중문화는 경제제일주의를 반영해왔다는 일관된 관점에서 지은이가 실시간으로 블로그에 기록했던 문화비평이 책으로 엮였다. 하지만 시곗바늘은 쉼없이 돌아간다. ‘전직 대통령의 자살’이란 충격적 사건은 불과 두 달 전 일이다. 여당이 미디어법을 강행처리한 것은 2주일 전이다. 경찰 특공대가 해고 노동자를 때려잡는 데 나선 것은 며칠 전이다. 문화비평도 쉴 틈이 없다. 책은 이미 후속편을 예고하고 있다. /난장·1만7000원. 김외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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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 김영민이 ‘이야기하는’ 영화
〈영화인문학〉
<트랜스포머-패자의 역습>이 극장가를 장악했다가 물러난 뒤, 한국 최초 재난영화인 <해운대>가 짧은 시일 안에 500만 이상의 관객을 모았다. 이 두 영화의 선전은 첨단을 자랑하는 컴퓨터그래픽(CG) 덕일까. <밀양>부터 <고래사냥>까지 영화 27편의 영화비평을 담은 <영화인문학>의 지은이 김영민 숙명여대 교수는 “아니다”라고 답할 게 분명하다. 그는 ‘영화가 영화인 이유’를 ‘컴퓨터그래픽’이 아니라 ‘이야기’에서 찾기 때문이다.
<영화인문학>은 그가 강조하는 ‘이야기’를 중심으로 ‘영화를 이야기한’ 책이다. 책 제목에 굳이 ‘비평’ 대신 ‘인문학’을 넣은 이유이기도 하다. 그는 영화를 소개하면서, 외국의 유명 영화비평가나 감독의 말을 인용하는 대신, 카뮈와 프로이트의 통찰을 원용한다. 당연히, 이 책에선 장면 전환의 기법 따위를 논하지 않는다. 대신에 진리, 종교, 가족, 조직, 타인, 욕망 등 인문학적 주제들이 그 자리를 메운다.
그가 영화 이야기를, ‘종교의 나르시시즘적 성격’을 다룬 <밀양>에서 시작해 ‘암울한 군사독재 체제’를 그린 <고래사냥>으로 매듭짓고 있는 것도 의미심장해 보인다. 형이상학에서 현실세계까지 인문학의 전 영역을 다루고자 하는 욕심이 읽히기 때문이다. 그렇게 그는 <괴물>에서 “진리의 낯섦”을, <달콤한 인생>에서 “조직의 관리 본능”을, <극장전>에서 “모방하는 욕망의 드라마”를, <복수는 나의 것>에서 “수많은 너로 이루어진 폭력의 구조”를 파악해낸다. 복잡한 영화 전문용어 없이 영화의 속내를 전달하는 힘, 그게 바로 인문학의 힘인 듯하다. /글항아리·1만5000원. 김보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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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홀의 ‘마릴린 먼로 작업’ 뒷얘기는?
〈앤디 워홀 일기〉
“1979년 12월 18일 화요일, 하루 동안 리무진을 빌렸다. 파울레트와 할스톤 쇼를 보러 갔다. 파울레트는 정말 매력적이었다. 그녀는 하얀 털 코트로 온몸을 감싸고 있었다.” 비범하면서도 콤플렉스가 많았던 워홀의 일기에는 유독 ‘보이는 것’에 대한 이야기가 많다.
그의 작품세계와 삶을 동시에 들여다볼 수 있는 앤디 워홀의 일기가 통째로 번역됐다. 원고지 6907장에 해당하는 분량. 일기는 1976년부터 1987년까지, 앤디 워홀이 팻 해켓에게 전날의 일화를 전화로 불러준 것에서 시작한다. 지은이 팻 해켓은 앤디 워홀의 가장 가까운 친구였다. 뉴욕 예술계의 슈퍼스타였던 앤디 워홀의 일상에는 유명 스타와 정치인, 명망 있는 문화계 인사들로 가득했다. 벨벳 언더그라운드와의 앨범 작업, 매혹적인 잡지 <인터뷰>의 창간, 마릴린 먼로 같은 스타의 초상화 작업 뒤에 숨겨진 야사를 듣는 재미가 크다. 보스턴 미술관에서 그의 작품 <전기의자>를 살짝 망가뜨린 일화, 달라이 라마와의 만남이 몹시 지루했다는 불평 등 젠체하지 않는 워홀의 고백이 날것 그대로 펼쳐진다. 뉴욕 문화와 팝아트의 뿌리를 파악하는 1차 텍스트로서의 구실뿐 아니라 고급문화와 저급문화, 예술성과 통속성이 어떻게 교차했는가를 살필 수 있다. 950쪽에 이르는 책 두께에 한 번 놀라고, 집요한 워홀의 관찰력에 또 한 번 놀란다. 앤디 워홀의 현실은 그의 작품처럼 현란하고 화려했지만 동시에 시시콜콜하고 허무했다. “1982년 8월 6일 금요일, 아주 우울한 날이었다. 내 생일이었다. 동네를 그냥 떠돌아다녔다.” 홍예빈 옮김/미메시스·2만9500원. 현시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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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영남 양반의 68년 가계기록
〈68년의 나날들, 조선의 일상사〉
조선 후기(영조~순조 연간) 중급 무관 노상추(1746~1829)는 열일곱 살 때부터 시작해 여든네 살에 생을 마감하기 이틀 전까지 일기를 썼다. 노상추는 안강 노씨 집안의 ‘장남 아닌 장남’(어린 두 형이 세상을 떠나 장남 노릇을 했다)으로, 집안을 이끌었다. 일기도 아버지 노철의 명에 따라 대를 이어 썼다. 그래서 68년 동안의 기록은 가족의 대소사를 기록하는 일종의 가계기록인 셈이다.
이런 진귀한 텍스트를 통해 국사편찬위원회 연구원을 지낸 문숙자 박사는 조선 후기 영남 양반의 제모습을 복원해 냈다. 노상추는 무과 준비를 시작해 10년을 고생했다. 과거 시험을 치르기 위해 한양을 다녀오는 데 한 달이 꼬박 걸렸고, 급제가 늦어지면서 물려받은 가산이 크게 줄어 평생토록 쪼들렸다. 동생과 아들도 비슷한 길을 걸었다. 당시 양반 사회의 경제적 무능력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대목이다. 관직에 오른 뒤 승급을 위해 노심초사하고, ‘영남 출신’이라는 피해의식도 숨기지 않았다.
노상추는 부인이 출산 과정에서 연이어 숨을 거둬 세 번이나 혼례를 올려야 했다. 12명의 자녀를 뒀지만 8명이 어린 나이에 숨졌다. 외직으로 떠돌 때 기생과 함께 정을 나눴고, 도망간 노비를 잡으러 직접 찾아다니기도 했다. 양반들의 일상사라 할까? 미야지마 히로시의 <양반>을 재미있게 읽은 독자라면 이 책에서도 감칠맛을 느낄 것 같다. /너머북스·1만4000원.
안창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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