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 최초로 맨부커 인터내셔널상을 받은 소설가 한강도, 유력한 노벨문학상 후보로 해마다 꼽히는 고은 시인도 블랙리스트의 사슬을 피하지 못했다. 가난한 예술가들에게는 생계가 걸린 문제이자 예술 창작의 버팀목 구실을 해야 할 지원 제도를 저들은 회유와 ‘처벌’의 수단으로 악용했다. 독립성, 창조성, 자율성을 생명으로 삼는 예술이 돈 몇푼에 길들여질 리 만무했다. 예술의 그런 속성을 알지 못하는 저들의 문화 정책이란 사실상 문화예술 말살 정책에 가까웠다.
■ 예술위 독립성 회복 ‘과제’
문화계 국정농단 실태가 본격적으로 불거진 것은 2015년 9월, 한국문화예술위원회(예술위·아르코)가 주관하는 ‘아르코문학창작기금’ 선정에서 극작가 이윤택을 비롯한 몇몇 작가들이 예술위 쪽의 요구로 선정 대상에서 제외되었다는 의혹이 제기되면서였다. 의혹은 그 뒤 사실로 확인되었거니와, 문학창작기금에 앞서 역시 예술위가 주관하는 우수문예지 발간지원 심사에서도 특정 잡지를 반드시 탈락시켜야 한다는 예술위 쪽 요구가 있었던 사실을 당시 심사위원이 <한겨레>에 밝히기도 했다.(
<한겨레> 2015년 9월11일치 1면 ‘정부, 문학창작심사 개입’)
문학인창작지원과 우수문예지지원 등을 통한 문학 쪽 국정농단의 핵심에도 블랙리스트가 자리잡고 있다. 최근 그 실체가 확인된 블랙리스트는 청와대와 문화체육관광부를 통해 내려와 실제 지원 사업을 집행하는 예술위 등을 통해 구체적으로 작동했다. 이 때문에 문화계 국정농단 재발을 막기 위한 대책 역시 사실상 문체부의 하수인으로 전락한 예술위의 자율성과 독립성을 회복하는 데에 우선적으로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특히 2006년 한국문화예술진흥원에서 한국문화예술위원회로 조직을 바꾸면서 문화예술위원들의 호선에 의해 위원장을 선임하도록 한 기존 방식에서 문체부 장관이 임명하는 현행 방식으로 바뀐 것을 원래 방식으로 되돌려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이와 관련해 정우영 시인(전 한국작가회의 사무총장)은 “최소한이라도 예술위의 독립성을 확보하자면 예술위원장만이라도 예술위원들끼리 선출하도록 해야 한다. 장관이 임명한 위원장이 장관의 지시에 맞서기는 어렵지 않겠나”라고 강조했다. 고영직 문학평론가도 “문화와 관련해 지금 정부가 할 일은 ‘무엇을 하겠다’가 아니라 ‘무엇을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는 것”이라는 말로 문화 행정의 신뢰성 회복 필요를 역설했다.
정우영 시인은 “예술위가 정상적으로 작동하도록 기능을 회복하는 것이 우선”이라며 “문예지 지원도 각 문학 단체의 기관지 지원으로 성격이 바뀌었는데 이것은 공공적 성격이 큰 지역 문예지와 시 전문지 등 특수 문예지의 존립을 위태롭게 하는 결정”이라고 비판했다.
2016년 12월17일 서울 광화문에서 열린 박근혜 퇴진 촛불집회에 참가한 염무웅 문학평론가(앞줄 가운데) 등 한국작가회의 회원들이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김주대 시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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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도서 문학나눔 문학진흥위로
한편 문학의 경우, 2015년 말 국회를 통과한 문학진흥법이 제구실을 하도록 인적·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는 것이 블랙리스트 악몽에서 벗어나는 방법이 될 수 있다는 견해도 있다. 가령 5·18을 다룬 한강의 <소년이 온다>를 포함해 공지영, 이외수 등 정부에 비판적인 목소리를 내온 작가들의 작품을 대거 탈락시켜 문제가 된 우수문학도서(세종도서 문학나눔) 선정 사업(
<한겨레> 2016년 11월16일치 1면 ‘블랙리스트 만든 정부, 한강 소설까지 사상검증’)은 문학진흥법상 신설되는 문학진흥위원회(가칭) 같은 주무 부서로 옮겨와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정우영 시인은 “문학진흥 5개년 계획을 문체부 예술정책과에서 준비하고 있다는데, 블랙리스트 주범이 수장으로 있는 정부 부처에서 문학진흥 계획을 세운다는 건 어불성설”이라며 “전문가들이 참여해서 실질적인 문학진흥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현재 문학진흥법은 뼈대만 있고 육체와 정신은 없는 상태”라며 “위원회가 됐든 재단이 됐든 이 법을 집행하고 감독할 독립 기구를 하루속히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 문화계 부역자들 책임 물어야
도서관협회 등과 함께 10여년째 다양한 사업을 벌여온 대표적인 민간 독서지원단체인 책읽는사회문화재단(책사회)은 단체 자체가 정부에 낙인찍혔다. 이 단체는 2003년부터 영유아들에게 생애 첫 선물로 책을 보내온 ‘북스타트 사업’ 등을 벌여 2007년부터 문체부 지원을 받았지만 2015년부터 전면 중단됐다.
안찬수 책사회 사무처장은 “북스타트 사업은 정부가 매년 3억~5억원씩 지원을 해왔는데 정부 지원 중단 뒤 사업을 축소하고 기부금 등으로 사업비를 충당하고 있다. 매년 3억~5억원 정도의 독서동아리 지원 사업, 지역 대표 독서 프로그램 지원 사업의 지원도 전면 중단돼 어려움을 겪어왔다”고 말했다. 그는 또 “정부의 지원 중단 이유가 사업 자체에 대한 평가가 아니라 도정일 이사장 등 책사회를 운영해온 책임자들이 야당 정치인 지지 선언에 동참하거나 세월호 사태 관련 서명자로 나선 것 등을 문제 삼은 것 같다”고 밝혔다.
정부는 출판계뿐 아니라 학자들 또한 치밀하게 감시하며 ‘길들이기’를 해온 것으로 보인다. 출판사 푸른역사가 운영하는 강좌 프로그램인 ‘푸른역사 아카데미’는 지난해 한국연구재단 시민강좌 프로젝트 지원 사업 분야에 ‘한국현대사와 국가폭력’이라는 주제로 기획서를 제출해 우수한 성적으로 예비선정 단계를 통과했으나 납득할 수 없는 이유로 탈락했다.
이 출판사 박혜숙 대표는 “프로젝트가 최종 탈락한 이유는 근거 없는 내용의 투서 때문이었는데, 강좌 무료운영 규정을 어기고 돈을 받았다는 말도 안 되는 한 줄짜리 내용이었다”고 말했다. 박 대표는 “급조된 투서라는 것이 명백해 보였지만 정면으로 문제 삼으면 큰 싸움이 되겠다 싶어 포기했다”고 덧붙였다.
이와 함께, 해당 아카데미 기획에 참여했던 한 대학교수가 세월호 참사 뒤 시민운동 쪽의 서명을 한 뒤 활동하던 각종 학술위원회에서 모두 배제당했다고도 했다. 박 대표는 “합리적인 보수로 일컬어지던 분이었는데, 그 뒤 많은 활동에서 제약을 받았고 그런 분들이 빠진 자리는 뉴라이트 계열 인사들로 채워졌다”고 말했다.
이원재 문화연대 문화정책센터 소장은 “문제의 핵심은 정부 문화행정의 부패 구조”라며 “그 중심에 있는 ‘부역자’들의 인적 청산이 먼저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이 소장은 “블랙리스트는 하나의 문서가 아니라 이명박·박근혜 정부가 지속적으로 축적한 어마어마한 양의 파일”이라고 했다. 정부에 비판적인 목소리를 내거나 협조적이지 않은 문화계·학계 인사들을 겨냥한 블랙리스트는 엠비 정부가 문화 관련 기구를 장악해 그 토대를 만든 뒤 박근혜 정부에서 선별적인 지원 사업 등으로 돈줄을 쥐는 쪽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이 소장은 “문화계 블랙리스트는 공안 탄압인 동시에 군부독재 시절과 다름없는 헌정유린과 민주주의 파괴로서, 이에 협조한 인사들 또한 엄중하게 책임을 물어 ‘문화계 블랙리스트 카르텔’을 깨야 한다”고 말했다.
최재봉 한승동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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