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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비선·정치권력 먹잇감 된 문화계…“인사제도 개혁 시급”

등록 2016-12-18 14:12수정 2017-01-01 18:21

‘문화 농단’ 싹을 자르자 (상)
허약한 인사시스템부터 바꿔라
최순실-차은택 국정농단 사태의 주무대였던 문화예술계는 깊은 허탈감에 빠져 있다. 이들의 전횡을 거든 부역자들을 솎아내는 것 못지않게 허물어진 공공 문화기관들의 인사·행정 체계와 블랙리스트 파문으로 타격을 입은 예술인 지원제도 등에 대한 근본적인 처방이 시급하다는 목소리가 높다. 문화판의 영역별로 국정농단의 허물을 씻고 자생성을 회복하기 위한 대안과 현장의 목소리들을 담아 앞으로 3차례 100도 지면에 연속기획으로 싣는다.

최순실씨와 측근 차은택씨는 왜 문화판을 겨냥해 이권사냥을 벌였을까. 문화예술계 전문가들이 공통적으로 짚는 요인이 있다. 문화체육관광부를 비롯한 문화계 공공 영역들이 일관된 정책적 기조나 인사 철학이 없고, 자체적으로 굴러가는 시스템이 부실해 정치적 외압에 전적으로 휘둘릴 수밖에 없다는 점을 이들이 간파했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그동안 정부의 문화정책은 정치권력이 바뀔 때마다 조령모개식 대응이 되풀이됐다. 전임 정부에서 해놓은 문화행정의 기본 체계와 방향을 다 엎어놓고 새로 시작하기 일쑤였다. 진보 보수 편가르기 지적도 없지 않았지만, 지원은 하되 간섭은 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분명히 내세웠던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문화예술 정책을 이명박 정부는 산하기관장 솎아내기 인사학살로 허물었다. 그리고 박근혜 정부에서는 원칙과 중심이 퇴색한 공공문화 영역에 최순실-차은택 일파의 사익 집단이 치고 들어와 문체부를 숙주로 삼고 전횡을 일삼으며 문화판을 초토화시키는 참극을 만들었다.

사유화된 권력이 개입할 수 없도록 문화기관 인사 시스템의 개혁이 무엇보다 시급하다고 문화계는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최-차 라인의 문화판 농단은 문화정책의 철학적 기조를 잡고 정치적 압박에도 맞설 수 있는 전문가 인사의 원칙이 철저히 무너진 데서 비롯됐다는 지적이다. 차은택씨가 대학원 은사인 김종덕 홍익대 교수를 장관 후보자로, 친척인 김상률 숙명여대 교수를 청와대 교육문화수석으로 최순실씨에게 천거한 뒤 그대로 장관 임명까지 이어진 것이 단적인 사례다. 김 전 장관이 국회 청문회를 거쳤다고 하지만, 문화계에서는 문외한이나 다름없었던 두 인사의 문화적 소양에 대한 검증 작업은 거의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조윤선 장관과 정관주 1차관이 작성을 주도했다는 의혹이 제기된 블랙리스트 작성과 관련해 문체부 안에서 청와대가 업무에 소극적인 차관과 국실장급들을 잇따라 인사조치했다는 폭로가 나온 것도 그런 파행상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더욱이 청와대 쪽은 2014년 8월 김종덕 장관 취임 직후 문체부 1급 관료 6명에 대한 찍어내기 인사를 주도하며 최씨가 전횡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었고, 박근혜 대통령이 가보고 싶다고 말한 프랑스장식미술전 추진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올 4월 김영나 국립중앙박물관장을 전격 경질해 논란을 불렀다. 김 전 장관 재임 기간 중 인사 상당수가 권력 실세 의중에 따라 자의적으로 이뤄져 파행이 빚어진 것이다. 청와대 등 정치권력이 문체부 등을 언제든 낙하산을 내리꽂을 수 있는 부처로 경시해온 데는 기관 공무원들의 전문성이 크게 떨어진다는 맹점이 작용한다. 문체부의 한 관계자는 “대부분의 간부급 관료들이 국외유학을 가서 스펙 쌓고 청와대에 잘 보이는 과시성 행사 사업 차리기에만 치중하는 분위기에서 현장 작가, 기획자들과 현안을 공유하며 의견을 전달하려는 이가 있겠느냐”고 지적했다. 이런 편향은 현장의 예술가, 기획자들도 대부분 수긍하는 현상이다. 국립중앙박물관의 한 전직 관계자는 “문체부 공무원들을 산하 기관 현장에 지속적으로 배치해 현장 예술가들과의 교류를 활성화시켜야 한다. 인사평가를 문체부 본부에서 할 것이 아니라 현장의 문화기관장에게 맡겨 제대로 된 예술계와의 소통이 이뤄지게 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지난달 4일 오전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우리 모두가 블랙리스트 예술가다 예술행동위원회’ 문화예술인들이 박근혜 대통령 퇴진 촉구 시국선언을 하고 있다. 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지난달 4일 오전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우리 모두가 블랙리스트 예술가다 예술행동위원회’ 문화예술인들이 박근혜 대통령 퇴진 촉구 시국선언을 하고 있다. 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구설만 낳는 공모, 인선과정 대수술해야 미술판은 차은택-김종덕 인맥의 인사 갑질과 이권사업에 들러리처럼 끌려다녔다. 최순실씨 일파가 문화계 장악을 본격화한 뒤 2014 광주비엔날레 특별전 출품 예정이던 홍성담 작가의 박근혜 대통령 풍자 그림인 <세월오월>의 전시가 불허돼 작가는 출품 철회 선언을 하고 광주를 떠났다. 김종덕 전 장관 인맥들은 광주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의 이영철 감독을 쫓아내고 사업을 장악한 뒤 올해 거액이 걸린 평창올림픽 문화사업으로 옮겨가면서 요직을 독차지했다.

최-차 라인의 국정 농단이 본격적으로 알려지면서 미술판에선 광주 아시아문화전당의 이영철 감독 해임을 주도한 뒤 평창올림픽 이권을 차지한 김종덕 인맥의 기획자, 평론가가 구설에 올랐고, 내년 베네치아 비엔날레 출품 작가와 기획자 인선 등에도 차은택-김종덕 라인과의 연관설이 입도마에 오르는 상황이다. 당사자들이 결백을 주장하고 부역의 확증적 단서도 포착되지 않는 상황이지만, 각종 자리의 인선 과정이 투명하지 않았다는 비판은 계속 나온다.

미술계 전문가들은 무엇보다 공공미술기관장이나 국내외 대형 미술 프로젝트의 출품 작가·기획자를 선정하는 과정에서 무늬만 남은 공모제도를 혁파해야 한다고 주문한다. 정권의 성향에 따라 예술가, 기획자들이 줄을 서고 입지가 달라지는 상황에서 공모는 사실상 권력 실세의 취향에 맞춘 인사 선정을 공식화하는 구실밖에 하지 못하고, 인재들은 지원하지 않는 양상만 낳는다는 것이다. 문체부 간부들이 공모 심사 과정에 당연직으로 배석해 심사위원들을 압박하는 관행도 바뀌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미술사가 최열씨는 “공모제 대신 임명제나 추천제로 바꿔 인사에 대한 책임을 분명히 부여해야 한다”고 했다. 평론가 박영택씨는 “기관장 인선의 투명성과 공정성이 생명인데, 관련 공무원, 재단 직원들은 일절 심사에 참여할 수 없도록 바꿔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영두(왼쪽) 안무가가 지난 10월29일부터 영국 런던 한국문화원 앞에서 용호성 문화원장이 지난해 국립국악원 예술 검열 사태의 책임을 질 것을 촉구하는 시위를 하고 있다.
정영두(왼쪽) 안무가가 지난 10월29일부터 영국 런던 한국문화원 앞에서 용호성 문화원장이 지난해 국립국악원 예술 검열 사태의 책임을 질 것을 촉구하는 시위를 하고 있다.
검열에 맞선 사상 최대의 저항 검열과 저항은 2016년 공연예술계를 요약하는 말이다. 지난해 9월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문화예술인 검열’이 드러나면서 연극인 1000여명이 ‘검열 반대’에 서명했다. 정부가 발뺌했지만, 연극인들은 올해 6~10월 다섯달 동안 22개 작품을 110차례 릴레이 공연하며 정부와 맞섰다. ‘권리장전 2016_검열각하’(검열각하)란 제목의 이 릴레이 공연은 한국 연극사에서 유례없는 저항의 무대가 됐다.

‘검열각하’ 공연 막바지인 10월 ‘블랙리스트의 존재’가 문화예술위 회의록을 통해 밝혀졌다. 이어 조윤선 문체부 장관이 청와대 정무수석으로 재직할 당시 정무수석실이 ‘문화예술인 블랙리스트’ 작성과 전달을 주도했다는 복수의 문체부 전·현직 당국자의 증언도 지난달 초 제기됐다.

블랙리스트의 존재가 드러나면서, 문화예술인들의 저항은 조직적으로 변화했다. 지난 11월4일 문화예술인들은 시국선언 ‘우리 모두가 블랙리스트 예술가다’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개최했다. 이들은 시국선언문에서 “예술검열, 블랙리스트, 문화행정 파괴의 실체는 박근혜 대통령”이라며 박 대통령 퇴진과 책임자 처벌을 요구했다. 그동안 사회문제에 침묵했던 클래식 음악인, 무용인들까지 동참하는 등 시국선언이 줄을 이었고, 문화연대·대학로X포럼 등 문화예술단체는 지난 12일 직권남용 및 업무방해죄 혐의로 김기춘 전 대통령 비서실장, 조윤선 장관 등을 ‘박영수 특검’에 고발했다.

블랙리스트, 시스템으로 막아야 정부기관의 블랙리스트 작성과 검열이 조직적으로 벌어지면서, 왜 이를 시스템적으로 막지 못했을까라는 의문도 남았다. 정부에서 특정 문화예술인을 지원 대상에서 배제하라고 요구하더라도, 문화예술위에서 견제하는 시스템이 작동하면 ‘블랙리스트’가 발붙이기 힘들다는 판단에서다. 이와 관련해 최근 문화계 안팎에서는 정부 개입을 차단하는 법·제도적 대안 모색이 활발해졌다. 이참에 문화예술기관장 선출 방식을 바꿔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안철수 국민의당 의원은 지난 14일 문화예술기관의 기관장 선출 방식을 바꾸고 민원수렴 창구를 개설해 자율성을 강화하도록 하는 내용의 공공기관 운영에 관한 법률 개정안을 대표 발의했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와 영화진흥위원회 등 문화예술 분야 준정부기관장의 선출을 현행 문체부 장관 임명에서 이사 중 호선 방식으로 바꾸는 내용이 뼈대다. 또 해당 기관의 민원에 대한 조사, 시정 또는 감사요구 등의 업무를 독립적으로 수행할 ‘옴부즈맨위원회’를 설치하도록 했다.

예술가 스스로의 반성도 요구된다는 지적이 나온다. 국립국악원 검열사태에 맞서 싸워온 정영두 안무가는 ‘창조경제를 내세운 문화예산 횡령’에 대해 의미심장한 지적을 했다. “세금을 개인 이익을 위해 사용했다면, 법의 심판을 받아야 한다. 하지만 이 부분에 대해 많은 예술가들이 자신을 마주해 사고해봐야 한다. 진보와 보수, 순수와 대중예술을 떠나 지원금이나 경제적 이익을 좇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연루될 수 있다. 작업이 준비되지 않았거나 어울리지 않는 프로젝트라면, 이름을 알리고 국가 지원금을 두둑하게 받을 수 있다 해도 거부할 줄 아는 자존감이 필요하다.”

노형석 손준현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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