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재 연출 데뷔작 ‘헌트’ 칸영화제 공개 현장 전두환 정권 안기부 공작정치 다룬 액션 누아르 영화 상영 뒤 이정재·정우성에게 7분간 기립박수
19일 자정(현지시각) 프랑스 칸 뤼미에르 극장에서 진행된 영화 <헌트> 공식 시사회에서 첫 연출을 맡은 이정재와 주연배우 정우성이 박수를 받으며 극장에 입장하고 있다. 칸/오승훈 기자
누아르와 액션으로 그려낸 전두환 시대의 공작 정치.
75회 칸국제영화제 미드나잇 스크리닝 부문에 초청돼 19일 자정(현지시각) 첫 공개된 이정재의 연출 데뷔작 <헌트>는, 글로벌 스타가 된 그에게 감독이라는 ‘레테르’(기호)가 더는 어색하지 않음을 입증한 영화였다. 지난해 넷플릭스 시리즈 <오징어 게임>으로 30여년 연기 인생에서 가장 화려한 날들을 보낸 그는, 자신이 연출과 주연을 맡은 <헌트>를 통해 한국 현대사의 비극과 광기를 장르적 문법 속에 보기 좋게 담아낸 감독으로 변신에 성공했다.
1983년 전두환 정권기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의 2인자인 박평호(이정재)는, 핵개발에 참여한 북한 고위관료의 망명 첩보를 입수해 접선차 일본으로 향한다. 박평호는 북한 고위관료로부터 안기부 내에 첩자인 ‘동림’이 있다는 정보를 듣지만, 동료들과 북한 고위관료를 잃은 채 작전은 실패로 끝난다. 새로 부임한 신임 안기부장은 일급기밀 사항들이 유출되자 첩자 동림 색출을 위해 국내팀 최고 책임자 김정도(정우성)에게 해외팀 최고 책임자 박평호에 대한 수사를 지시한다. 당시 친척 장영자의 4000억원 비리 사건으로 수세에 몰린 전두환 정권이 남북 간 긴장을 통해 위기를 돌파하려 했던 것. 군 출신인 김정도는 중앙정보부(중정) 부장 김재규가 박정희를 총살한 10·26 사태 이후 중정 요원이었던 박평도를 한달 동안 조사했던 인물. 당시 국군보안사령부에 의해 무장해제된 뒤 중정에서 안기부로 이름이 바뀐 조직에서 살아남은 박평호는, 경쟁자 김정도에게 적의를 느낀다. 그런 그에게 안기부장은 동림에 대한 수사 대상에 김정도를 넣으라고 지시한다. 결국 해외팀과 국내팀은 상대를 용의선상에 올려두고 공작을 벌이는 사생결단에 나선다.
19일 자정(현지시각) 프랑스 칸 뤼미에르 극장에서 진행된 영화 <헌트> 공식 시사회가 끝난 뒤 첫 연출을 맡은 이정재와 주연배우 정우성이 관객들의 기립박수에 포옹하며 웃고 있다. 칸/오승훈 기자
동림을 찾아내지 못하면 첩자로 몰리게 될 상황, 서로를 사냥하기 위해 달려들던 박평호와 김정도는 감춰진 실체에 다가서게 되고 마침내 ‘대한민국 1호 암살 작전’이라는 거대한 사건과 직면하게 된다.
<헌트>는 우민호 감독의 영화 <남산의 부장들>(2020)이 다룬 중정 공작 정치 이후를 그리지만, <남산…>과는 사뭇 다르다. <남산…>이 권력의 어두운 속성에 집중한다면, <헌트>는 더 직접적이고 대담하게 전두환 정권 초기의 폭력과 독재의 그늘을 묘사한다. 영화에서 안기부는 전두환 정권의 연장을 위해 간첩단 사건을 조작하고 그 과정에 고문과 폭력을 일삼는 무법천지의 권력 기관으로 묘사된다. 국민을 향하던 공작 정치는 결국 내부로까지 대상을 넓히게 된다. 제목 <헌트>는 ‘레드 헌트’(빨갱이 사냥)에서 시작된 사냥(헌트)의 총구가 안을 향하게 됨을 비유하는 것으로 읽힌다.
영화 <헌트> 스틸컷. 메가박스중앙플러스엠 제공
그 광기의 역사를 담는 그릇은 누아르의 문법과 폭발적인 액션, 그리고 역사에 기반한 이야기다. 평생지기 친구 사이인 두 배우는, 독재자의 하수인으로 살아가는 냉혈한들의 피로와 공허를 어두운 공기 속 명멸하는 눈빛 연기로 그려내 보였다. 근접 폭발신을 비롯해 후반부 대규모 폭발 장면과 곳곳의 총격신은 액션 영화의 미덕을 두루 갖추고 있다. 무엇보다 5·18 민주화운동 당시 광주에 방문한 전두환이 사살 지시를 내리는 장면과 아웅산 폭발 사고 등 역사적 사실에 기대 극을 전개한 점은 이 영화의 남다른 용기로 보인다.
영화 <헌트> 스틸컷. 메가박스중앙플러스엠 제공
<헌트>는 ‘넘사벽’인 카메오 출연으로도 본전을 뽑을 만한 영화다. 황정민, 이성민, 주지훈, 김남길, 조우진, 박성웅, 정만식, 유재명 등 내로라하는 배우들이 총출동해 동료 배우의 연출 데뷔작을 빛냈다.
이날 칸 뤼미에르 극장에서 열린 공식 시사회에는 밤 11시부터 국내외 취재진과 세계 영화계 관계자, 시민 등 2000여명이 넘는 인파가 몰려 장사진을 이뤘다. 칸영화제 공식 시사회 ‘드레스코드’에 따라 20대부터 60대까지 모두 정장과 드레스로 한껏 멋을 낸 채 <오징어 게임> 장면 등을 이야기하며 배우 이정재의 첫 연출작에 대한 기대를 내비쳤다.
영화 <헌트> 스틸컷. 메가박스중앙플러스엠 제공
티에르 프리모 칸 집행위원장의 영접을 받으며 극장에 입장한 이정재와 정우성에게 관객들은 기립박수를 보냈다. 오프닝과 함께 종종 터져나온 박수는 131분의 영화가 끝나자 다시 7분간의 기립박수로 바뀌었다. 이정재는 “즐거운 시간이 되길 바랐다. 감사드린다”고 영어와 프랑스어로 인사한 뒤, 감격해하며 정우성과 포옹을 나누기도 했다.
19일 자정(현지시각) 시작하는 영화 <헌트> 공식 시사회에 앞서 관람객들이 칸 뤼미에르 극장 앞에 한시간이나 일찍 와 줄을 선 모습. 칸/오승훈 기자
관객들의 반응도 뜨거웠다. 친구와 함께 영화를 봤다는 프랑스인 실비아(24)는 “연기도 잘하는데 연출도 이렇게 잘하면 어떡하냐”며 “한국 현대사를 잘 모르지만 너무 재밌게 봤다”고 했다. 영국인 알렉스(29)는 “두 잘생긴 배우의 연기 대결을 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다”며 “<오징어 게임>에서 후줄근한 모습만 보다 슈트 입은 모습을 보니 너무 멋있다”고 했다. <헌트>는 올여름 국내 개봉 예정이다.
칸/글·사진 오승훈 기자 vino@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