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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사랑’의 등대를 꺼버린 국립국어원

등록 2014-04-11 19:19수정 2015-10-23 18:51

[토요판] 김세윤의 ‘재미 핥기’
“보세요.”

기시베는 의기양양하게 가슴을 폈다. “더 이상한 것은 ‘사랑’에 관해 설명한 2번의 뜻풀이입니다. ‘2) 이성을 사모하는 마음. 성욕을 동반할 때도 있다. 연애’라고 돼 있어요.”

“이상한가요?”

마지메는 완전히 자신을 잃은 모습으로 기시베의 안색을 살폈다.

“어째서 이성에 한정하냐고요. 그럼 동성애 사람들이 때로 성욕도 동반하여 상대를 그리워하고 소중하게 생각하는 마음은 사랑이 아니란 건가요?”

“아뇨, 그렇게 말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러나 거기까지 꼼꼼히 살필 필요가…….”

“있습니다. 마지메 씨. <대도해>는 새로운 시대의 사전이지 않나요? 다수파의 비위를 맞추고 고루한 생각과 감각에 얽매인 채, 날마다 변해가는 말을, 변해가면서도 흔들리지 않는 말의 근본 의미를 정말로 뜻풀이할 수 있으세요?”

“지당한 말입니다.” 마지메의 어깨가 축 처졌다.

(일본 영화 <행복한 사전>의 원작 소설 <배를 엮다>(문학동네) 중 253~254쪽 인용)

“보세요.”

나도 기시베처럼 의기양양하게 가슴 펴는 상상을 한다. “더 이상한 것은 표준국어대사전의 ‘사랑’에 관한 네 번째 뜻풀이입니다. ‘남녀 간에 그리워하거나 좋아하는 마음’으로 돼 있어요.”

“이상한가요?”

국립국어원 담당자가 ‘완전히 자신을 잃은 모습으로’ 나의 안색을 살피는 상상도 해본다.

“동성 간에 그리워하거나 좋아하는 마음은 사랑이 아니라는 건가요? 분명히 몇달 전만 해도 ‘어떤 상대의 매력에 끌려 열렬히 그리워하거나 좋아하는 마음’이던 네 번째 뜻풀이가 왜 이렇게 바뀐 거죠? 종교계의 비위를 맞추고 고루한 생각과 감각에 얽매인 채, 날마다 변해가는 말을, 변해가면서도 흔들리지 않는 말의 근본 의미를 정말로 뜻풀이할 수 있으세요?”

“지당한 말입니다.”

물론 그럴 리야 없겠지만, 말문이 막힌 담당자의 어깨가 축 처지는 상상까지 마치고, 나는 소설의 다음 페이지를 내처 읽기 시작한다.

“그러고 보니 니시오카 씨한테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 말을 사전에서 찾아본 사람이 든든하게 느낄지 어떨지 상상해봐’라고. 자신은 동성을 사랑하는 사람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젊은이가 <대도해>에서 ‘사랑’을 찾는다. 그때 ‘이성을 사모하는 마음’이라고 쓰여 있으면 어떻게 느낄까.”(같은 책 255쪽)

소리 내어 한 번 더 읽어본다. ‘그 말을 사전에서 찾아본 사람이 든든하게 느낄지 어떨지 상상해봐.’ 나는 이것이 무언가를 쓰고 짓고 엮고 찍고 만들고 생산하는 모든 이의 마음가짐이어야 한다고 믿는다. 내 글을 읽는, 내 영화를 보는, 내 노래를 듣는 누군가 잠시나마 든든해지기를 바라는 마음. 그런 마음들이 빚어낸 결과물은 마치 등대와 같아서, 가만히 그 자리에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퍽 안심이 될 것이다.

국립국어원은 스스로 등대를 꺼버렸다. 남자가 남자를, 여자가 여자를 그리워하는 마음은 ‘사랑’이 아니라고 말해버렸다. 방대한 국어사전에서 고작 한 문장을 바꿨다. 하지만 동성을 좋아하게 된 어떤 사람이 자신의 발그레한 감정을 인정받고 싶어 사전을 찾는다면, 바로 그 ‘고작 한 문장’ 앞에서 하나의 삶이 외로워질 것이다. 수많은 가슴이 뻥 뚫리고 말 것이다.

이제 나는 <배를 엮다>를 덮고 어제 산 시집 <영원한 귓속말>(문학동네)을 펼친다. ‘펴내며’라는 제목 아래 꽃씨처럼 뿌려 놓은 예쁜 머리말을 읽는다. “언어는 문학의 매체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삶 자체의 매체다. 언어가 눈에 띄게 거칠어지거나 진부해지면 삶은 눈에 잘 안 띄게 그와 비슷해진다. 그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마음들이 계속 시를 쓰고 읽을 것이다. 시가, 없으면 안 되는 것이 아니라 해도, 시가 없으면 안 된다고 믿는 바로 그 마음은 없으면 안 된다.”

김세윤 방송작가
김세윤 방송작가
<배를 엮다>의 기시베와 마지메는, 말하자면 ‘시를 쓰고 읽는 마음’으로 ‘행복한 사전’을 만들었다. 언어가 진부해지면 삶도 진부해진다는 믿음으로 정성껏 말을 매만졌다. 국립국어원에 계신 분들은 어떤 마음으로 사전을 만들었을까. 그들 삶의 어떤 진부함이 이렇게 진부한 뜻풀이를 용납한 걸까. 결국 마지메는 기시베의 충고를 받아들여 ‘사랑’의 뜻풀이를 고친다. ‘이성을 그리워하다’를 ‘타인을 그리워하다’로. 그렇게 등대를 다시 켠다. 덕분에 누군가의 마음이 다시 든든해진다.

김세윤 방송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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