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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체념했을지 모를 ‘두 발로 걷는 개’들에게

등록 2015-04-24 20:16수정 2015-10-23 18:29

[토요판] 김세윤의 재미핥기
하겐은 하루아침에 거처를 잃었다. 사랑하는 가족과 강제로 헤어졌다. 배가 고파 거리를 헤매다 잘 곳이 없어 노숙을 시작했다. 비정한 도시의 뒷골목에서 하겐은 살기 위해 발버둥쳤다. 노예처럼 일하며 악착같이 버텼다. 그때 단속반이 들이닥쳤다. 그들이 보호소라 부르는, 그러나 누가 봐도 수용소에 불과한 외딴 건물에 갇혔다. 그곳에는 삶의 벼랑 끝에 내몰린 존재들이 참 많았다. 하겐 같은 처지가 흔했다.

곧바로 폭언과 학대가 시작되었다. 더러는 밥을 굶기고 때로는 구타도 서슴지 않았다. 맞으며 생각했다. 이게 사는 건가? 밤마다 고민했다. 계속 이러고 살아야 하나? 하지만 주위를 둘러보면 온통 무거운 침묵뿐. 자신이 처한 현실에 물음표를 붙이는 이가 없었다. 체념하고 복종할 따름이었다. 왜 그리 무기력하냐고 하겐은 따져 묻지 않았다. 그들이 필경 이렇게 답할 것이기 때문이다. 세상이 원래 그러니까. 우리의 운명이니까. 우리는… 개니까.

영화 <화이트 갓>
영화 <화이트 갓>
순종견만 용인되는 나라 헝가리. 잡종견 키우려면 별도의 세금을 내야 하는 괴상한 정책 때문에 실제로 유기견이 늘고 있다는 부다페스트. 개한테 쓸 돈 따윈 없다며 아빠가 내다버린 잡종견 하겐과 녀석을 애타게 찾아 헤매는 13살 소녀 릴리의 이야기. 영화 <화이트 갓>은 보호소를 탈출한 하겐이 ‘감방 동료’ 수백 마리를 이끌고 도심 한복판을 질주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겁에 질린 인간들이 모두 도망쳐 텅 빈 거리엔 개떼의 헐떡임만 가득하다. 거친 숨을 토해내며 달리는 대열 맨 앞에 하겐이 있다. 지난해 칸국제영화제를 발칵 뒤집어놓았다는 희대의 오프닝. 컴퓨터그래픽을 쓰지 않고 실제 유기견 250여마리를 거리에 풀어놓고 찍은 문제적 장면. 야심차게 찍은 클라이맥스 시퀀스로 일단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은 뒤, 이제 영화는 하겐과 친구들이 그토록 성난 얼굴로 질주하게 된 사연을 차근차근 되짚어 가는 것이다.

감독 코르넬 문드루초는 말한다. “인간의 사악함으로 가득한 사회에서 영감을 얻어” 이 영화를 만들었다고. “‘소수자’를 길들이고 ‘불평등’을 부정하면서 (타인과의) 평화로운 공존을 믿지 않는” 사람들을 비판하고 싶었다고. “불평등에 맞서 싸우는 하겐을 응원”하며 영화를 본 관객이라면 “기만을 일삼는 어른들이 되진 않을” 것이라 믿고 싶다고.

말하자면, 하겐은 가난한 흑인의 또 다른 이름이다. 지중해에 가라앉은 이민자의 숨겨진 본명이다. 장애인의 날 휠체어에 앉은 채 경찰에 포위된 이웃이면서, 높은 굴뚝에 올라 자신의 절박함을 증명해야 하는 노동자다. 이 세상이 자신의 목줄을 바투 잡고 점점 더 숨통을 조여온다고 느끼는 작은 존재들은 모두 ‘두 발로 걷는 하겐’일 수밖에 없다. 저마다 보이지 않는 철장에 갇혀 혼자 끙끙대는 개일 수밖에 없다.

<혹성탈출: 진화의 시작>에서 좀처럼 잊을 수 없는 한 장면. 유인원 보호 시설의 우리 밖에 주인공 시저(앤디 서키스)가 서 있다. 몽둥이를 든 직원이 다가온다. “당장 우리로 들어가지 못해!” 윽박질러도 꿈쩍하지 않는 시저. 공기를 가르는 몽둥이. 두어 번의 구타. 그러나 다음 순간, 몽둥이 든 인간의 손을 시저가 움켜쥔다. “더러운 앞발 치우지 못해. 이 멍청한 원숭이야!” 비아냥대는 인간을 향해 마침내 시저가 내뱉은 단호한 일성. “노(No)!” 인간의 언어를 배우고 익힌 침팬지가 맨 처음 입 밖으로 꺼낸 단어. 노. 그 한마디로 인해 유인원은 더 이상 유인원이 아니다. 인간을 닮았을 뿐 아직 진짜 인간이 되지 못한 존재가 비로소 인간다움을 획득하는 ‘진화의 시작’은 ‘아니요’, 짧지만 힘이 센 한 단어였다. 그러므로 지금, 여기, ‘기만을 일삼는 어른들’을 향해 단호하게 ‘노’라고 말하지 못하는 한 우리 모두는 ‘진짜 인간’일 수 없는 것이다.

김세윤 방송작가
김세윤 방송작가
<화이트 갓>에는 일찌감치 ‘개 버전 <혹성탈출>’이란 수식어가 붙었다. 자신의 목줄을 조이는 상대에게 이빨을 드러내고 으르렁대는 것으로 하겐은 자신만의 ‘노’를 외친다. 버림받은 개에서 저항하는 개로, ‘진화의 시작’이다. 세상이 원래 다 그런 거니까 하고 이미 체념했을지 모를 ‘두 발로 걷는 하겐’들에게 이 영화가 좋은 자극이 될 것이다. 아름답고 숭고한 마지막 장면에선 적잖이 뭉클하기도 할 것이다. 작년 칸국제영화제에서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 대상을 받고 이달 초 국내에 개봉했던 이 영화는 이제 아이피티브이(IPTV)에서 볼 수 있다.

김세윤 방송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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