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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기적은 셀프’…교황은 잠시 다녀가실 뿐

등록 2014-08-15 18:28수정 2014-08-17 11:47

영화 <아빠의 화장실>(2007)
영화 <아빠의 화장실>(2007)
[토요판] 김세윤의 재미핥기
그림자가 보인다. 부지런히 페달 밟는 사람의 그림자. 울퉁불퉁한 비포장도로 표면 따라 역시 울퉁불퉁 출렁이며 흘러가는 자전거의 그림자. 해 질 무렵 자전거 탄 남자의 길게 늘어진 그림자가 황톳길 위를 미끄러지는 풍경은 살짝 낭만적이기까지 하다.

이때 뒤에서 오토바이 등장. 자전거 그림자 깔아뭉개며 쌩 하고 지나가는 오토바이. 더 빠른 탈것의 뒤꽁무니를 부러운 듯 쳐다보는 주인공 베토(세사르 트롱코소)의 일그러진 얼굴이 그제야 카메라에 잡힌다. 실은 그가 얼마나 힘들게 페달을 밟는지 관객이 뒤늦게 눈치 채는 순간이다. 알고 보니 황톳길은 매우 가파른 오르막이고, 이제 보니 자전거 뒤엔 무거운 짐이 한 보따리. 그것은 결코 낭만적인 풍경이 될 수 없다. 낡아빠진 자전거에 짐을 가득 싣고 매일 높고 험한 산 하나를 넘어야 겨우 먹고사는 밀수꾼의 인생이란, 아무리 생각해도 낭만적일 수가 없는 것이다.

영화 <아빠의 화장실>(2007)은 그렇게 시작한다. 한 남자의 구체적인 가난이 막연한 그림자로 뭉개져 비틀대며 굴러가는 게 첫 장면이다. 역시 저마다 자신만의 포즈로 비틀대며 하루하루 간신히 삶의 오르막을 넘는 이들이 그 남자의 이웃이다. 이 가난한 마을의 다른 이들처럼 남자도 희망보다 체념이라는 단어를 먼저 배웠다.

그러던 어느 날. 온 마을 주민이 난생처음 희망이란 걸 품게 된다. 이 작고 누추한 마을에 교황이 오신다니. 덕분에 관광객 5만명이 몰려올 거라니. 마을 사람 모두 한몫 잡을 기회다. 누구는 가진 돈 다 털어서 고기를 사고, 누구는 대출까지 받아 소시지를 만든다. 뭐니 뭐니 해도 먹는 장사가 제일이란다.

하지만 베토의 생각은 다르다. 개나 소나 먹는 장사에 뛰어들 땐 개나 소가 하지 못하는 생각을 해야 하므로. 뭘 먹었으면 반드시 뭔가를 싸는 것이 인간이므로. 그는 유료화장실을 만들기로 한다. 좌변기라는 선진 문물을 수입하여 돈 많은 외지인들이 맘 편히 앉아 싸는 세상을 꿈꾼다. 경쟁자 없는 독점 사업. 교황님 오시기 전까지 변기 하나 살 돈만 모으면 끝. 그리하여 다시 자전거에 오르는 주인공. 처음으로 ‘오늘의 끼니’가 아니라 ‘내일의 희망’을 위해서 무릎이 부서져라 페달을 밟기 시작한다.

어느 가난한 아빠의 ‘웃픈’ 휴먼드라마 <아빠의 화장실>은 1988년 우루과이 시골 마을 ‘멜로’에서 일어난 실제 사건을 영화로 옮겼다. 주인공 비토처럼 유료화장실 만든 이가 진짜 있었는지는 모르겠으나,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이 외딴 마을까지 찾아온 게 사실이고, 온 마을 사람들이 전 재산 털어 장사 준비에 매달린 것도 사실이다. 당시 우루과이 언론은 교황이 오기만 하면 벼랑 끝에 내몰린 이들의 모든 실의와 체념과 절망이 치유될 것처럼 호들갑을 떨었다. 그래서 절박한 사람들이 오직 교황만 기다리게 만들었다. 지금 이 나라의 언론들처럼. 그리하여 그저 ‘기회’일 뿐인데 사람들은 자꾸 ‘기적’을 바라고 있었다. 지금 이 나라의 시민들처럼.

하지만 ‘방문’과 ‘말씀’만으로 일어나는 기적은 없다는 걸 이 영화가 보여준다. 그분은 여기를 잠시 ‘다녀가는’ 존재일 뿐, 여기에서 계속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결국 내 숨이 차오르지 않고 가파른 오르막을 넘는 묘수는 없다. 내 두 다리로 페달을 밟지 않으면 삶은 단 1㎝도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잠시 흐릿해 보이던 이 냉혹한 현실은 교황이 다녀간 뒤 더 선명해졌다. “기적은 언제나 셀프서비스!” 2009년 국내 개봉 당시 이 영화가 내세운 이 한 줄 카피는 그래서 여전히, 지금, 이곳에서도 옳다.

다시 영화 <아빠의 화장실>. 드디어 교황께서 마을에 도착하는 클라이맥스. 어서 변기를 설치해야 하건만 인적 드문 도로 한복판에서 그만 자전거가 고장나버렸다. “지금 쓰러지면 안 돼, 이 고물 자전거야. 조금만 더 버텨. 오늘 일만 잘 끝내면 널 푹 쉬게 해줄게. 실비아가 세탁소 갈 때 도와줘야지. 학교 앞에서 기다려도 주고… 넌 아직 할 일이 많잖아.”

김세윤 방송작가.
김세윤 방송작가.
자전거를 붙들고 하소연하는 베토. 계속 누워만 있는 고물 자전거. 과연 베토의 자전거가 다시 힘을 낼 수 있을까? 아빠의 화장실이 무사히 문을 열 수 있을까? 세월호의, 강정의, 밀양의, 쌍용의 눈물을 싣고 휘청이는 우리 사회는, “아직 할 일이 많”은데도 자꾸 멈춰 서는 베토의 자전거와 무엇이 다를까?

김세윤 방송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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