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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생로병사’의 바다를 헤쳐가는 ‘희로애락’

등록 2014-11-28 19:20수정 2015-10-23 18:44

[토요판] 김세윤의 재미핥기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내가 당한 가장 엄청난 스포일러. 그것은 바로… ‘생로병사’(生老病死). 나는 ‘생로병사’가 ‘아주 보통의 인생’을 조금 달리 이르는 말이라고 짐작했었다. 그러다 어느 날, 어디에서 읽었는지 이제는 잊어버린 누군가의 글에서 대략 이런 요지의 천기누설을 보고 말았다. “이미 태어난(生) 우리에게 앞으로 남은 건 늙고(老), 병들고(病), 죽는(死) 일뿐이다.” 젠장. 아무리 발버둥쳐봐야 내 인생의 남은 러닝타임이 오직 늙고 병들고 죽는 것으로 채워진다니. 정말 가혹한 새드엔딩. 실로 맥빠지는 스포일러. 한동안 날 시무룩하게 만들었다.

축 처진 내 어깨를 토닥인 건 또 다른 네 글자. 희로애락(喜怒哀樂). 늙고 병들고 죽는 일만 남은 인간이라면 기쁘고 즐거울 리 없지 않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로애락. ‘사람이 살아가면서 느끼는 네 가지 감정’의 시작과 끝에 ‘기쁨’과 ‘즐거움’이 두 기둥처럼 버티고 선 모양새가 작은 위안이 되었다. ‘희’(喜)와 ‘락’(樂), 웃는 표정의 두 감정이, ‘노’(怒)와 ‘애’(哀), 슬픈 표정의 두 감정과 팽팽히 맞서고 있는 게 괜히 듬직해 보였다. 0 대 4로 지는 줄 알았던 경기가 뒤늦게 2 대 2 무승부로 정정되는 걸 보며 조금 안도하는 기분이었달까.

인간은 누구나 늙고 병들고 죽는다. 이 슬프고 노여운 운명에도 불구하고 기어이 기쁘고 즐거운 순간을 만들어낸다. ‘희’와 ‘락’에 의지해 ‘노’와 ‘애’를 견디어 낸다. 그것이 바로 ‘이야기’의 힘이라고 나는 믿는다. 좋은 이야기를 판별하는 기준으로 “인생의 생로병사를 담고 있다”고 말하지 않고 “인생의 희로애락을 담고 있다”고 말하는 이유다.

영화 <행복한 사전>에서 <대도해>(大渡海), 즉 ‘큰 바다를 건너다’라고 이름 붙인 사전을 기획하면서, 사전 감수를 맡은 백발의 마쓰모토 선생이 말했다. “단어의 바다는 끝없이 넓지요. 사전은 그 넓은 바다에 떠 있는 한 척의 배. 인간은 사전이라는 배로 바다를 건너고 자신의 마음을 적확히 표현해줄 말을 찾습니다. 누군가와 연결되길 바라며 광대한 바다를 건너려는 사람들에게 바치는 사전. 그것이 바로 ‘대도해’입니다.”

‘단어의 바다’를 ‘인생의 바다’로, ‘사전’을 ‘이야기’로 바꾸어 다시 읽어도 말이 된다. 우리 모두에겐 배가 필요하다. 이야기가 필요하다. ‘생로병사’의 거친 바다 위 작은 조각배처럼 흔들리며 떠 있는 이야기. 뱃전을 넘어온 파도가 ‘슬픔’과 ‘노여움’을 퍼부을지라도, ‘기쁨’과 ‘즐거움’의 노를 쉼없이 저어 나아가는 한, 이야기는 가라앉지 않을 것이다. 그 이야기에 의지해 생을 건너는 우리도 가라앉지 않을 것이다. 세상엔 다행히, 그렇게 힘이 되는 이야기들이 존재한다. 다큐멘터리 영화 <목숨>(사진) 같은 이야기가.

“완치가 어려운 환자가 육체적, 심리적 고통을 완화하고 마지막 시간을 보내며 남은 삶의 의미를 찾는 곳.” 호스피스의 뜻을 풀이하는 첫 자막 뒤에 이 문장 하나를 덧붙이며 영화는 시작된다. “호스피스에 입원하는 환자들의 평균 생존기간은 21일이다.” 그 뒤 영화는 생로병사의 최전선에서 암환자들이 치르는 마지막 전투를 보여준다. <퓨리>의 탱크 안에서 최후를 맞이하는 군인들처럼 그들은 죽음을 코앞에 두고도 서로를 쳐다보며 웃는다. 어쩔 수 없는 슬픔과 노여움으로 종종 흐느낄 때도 있지만, 이내 찌푸린 미간을 풀면서 기쁘고 즐거웠던 순간만 기억하려 애쓴다. 무기력하게 0 대 4로 완패하지 않는, 기어이 2 대 2 무승부를 만들어내는 희로애락의 미소. 그 미소 앞에서 생로병사의 비명이 잠시 자리를 비켜주는 순간들이 영화에 담겼다.

일본 작가 나쓰메 소세키가 말했다. “여하튼 인간 세상은 살기 힘들다. 살기 힘든 것이 심해지면 살기 편한 곳으로 옮겨가고 싶어진다. 어디로 옮겨가도 살기 힘들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시가 태어나고 그림이 태어난다.”

김세윤 방송작가
김세윤 방송작가
살기 힘든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죽는 것 또한 쉽지 않다는 걸 깨달은 사람들. 생의 벼랑 끝에서 그들이 내뱉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시가 된다. 남은 이들에게 보내는 눈짓 하나하나가 그림이 된다. 어차피 중력을 피할 수 없다면 최대한 근사한 포즈로 그 중력에 이끌리겠다며 뛰는 다이빙 선수의 몸짓처럼, 다큐 영화 <목숨>의 주인공들은 피할 수 없는 죽음을 향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포즈로 다가간다. 그게 힘이 된다. 의지가 된다. 더 힘차게 내 삶의 노를 젓게 만든다.

김세윤 방송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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