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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근사한 삶에 근사해지고 싶다

등록 2015-01-09 19:17수정 2015-10-23 18:44

영화 <내일을 위한 시간>
영화 <내일을 위한 시간>
[토요판] 김세윤의 재미핥기
2019년. 땅이 재로 뒤덮인다. 먹을 게 없다. 살아남을 수만 있다면 무슨 짓이라도 저지를 사람들이 넘쳐난다. 어린 아들 손 잡고 그 황폐한 지구 위를 걸어가는 남자. 그들 앞에 펼쳐진 끔찍한 광경. 인간이 인간을 잡아먹고 있다. 겁에 질린 아들이 묻는다. “아빠, 우린 좋은 사람들인가요?”

상황은 점점 악화된다. 남을 먼저 잡아먹지 않으면 내가 곧 잡아먹힐 지경이다. 딱 남들처럼만 이기적인 인간이고 싶은 유혹에 휩싸인다. 그럴 때마다 아들이 묻는다. “우린 지금도 좋은 사람들인가요?” 그럴 때마다 아빠가 답한다. “그래. 우린 지금도 좋은 사람들이야.” “그리고 앞으로도요.” “그래. 앞으로도.” “우린 아무도 안 잡아먹을 거죠?” “그래. 안 잡아먹어.” “무슨 일이 있어도요.” “그래. 무슨 일이 있어도.”

코맥 매카시가 쓴 소설 <로드>의 대화를 다시 살핀다. 그 소설을 영화로 만든 <더 로드>(2009)의 장면도 다시 떠올린다. 영화 <내일을 위한 시간>(사진)을 보았기 때문이다. ‘살아남을 수만 있다면 무슨 짓이라도 저지를’ 사람들의 어떤 선택과, ‘남을 먼저 잡아먹지 않으면 내가 곧 잡아먹힐 지경’에 처한 주인공의 어떤 선택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들의 서로 다른 선택을 지켜보다가 문득 오래전 삼켜버린 <로드>의 그 질문이 신물처럼 넘어와 입안에 고였기 때문이다. “우린 좋은 사람들인가요?”

사장은 산드라(마리옹 코티야르)의 복직 여부를 직원 투표에 부쳤다. 산드라가 복직되지 않으면 다른 직원들이 보너스를 받게 된다고 말했다. 14:2. 산드라 편에 서겠다는 직원은 겨우 두명. 산드라의 일자리보다 자신들의 보너스가 더 중요하다는 직원이 열네명. 사장에게 매달려 월요일 재투표를 허락받았다. 주말 동안 직접 동료들을 설득할 작정이다. 보너스를 택한 열네명을 일일이 찾아가 부탁하기 시작한다.

“내가 계속 일할 수 있게 나한테 투표해줬으면 해.” 산드라가 어렵게 꺼낸 이야기 앞에서 동료들은 저마다 다른 대답을 내놓는다. 그들 가운데 악당은 없다. 다만,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치는 또 다른 산드라들이 있을 뿐이다. 드디어 운명의 시간. 여전히 자신의 보너스가 더 중요한 사람. 이제라도 동료의 일자리가 더 중요해진 사람. 그중 어느 쪽의 수가 더 많을지 관객도 함께 손가락을 꼽으며 헤아리게 되는 월요일 아침의 시간. 바로 우리 모두의 ‘내일을 위한 시간’.

“아빠, 우린 지금도 좋은 사람들인가요?” 결국 이 질문 하나가 길 위의 아빠를 계속 좋은 사람이게 만들었다. ‘딱 남들처럼만 이기적인 인간’이고 싶다가도 이내 정신 차리게 만들었다. “우리는 가슴속의 불을 옮기는 사람이야.” 자신이 했던 말을 끝까지 책임지는 어른으로 만들었다. “그 자신의 마음속에서 이미 재가 된 것을 아이의 마음속에서 불로 피워 올릴 수는 없다는 것”을 깨닫게도 만들었다. “아빠, 우린 지금도 좋은 사람들인가요?” 이 짧은 질문 하나가 그를, 마지막까지 ‘인간’일 수 있게 만든 것이다.

근사하다. 형용사. (1) (무엇이) 그럴듯하게 괜찮거나 썩 훌륭하다. 예문: “너 그렇게 차리고 나서니까 참 근사하구나.” (2) (무엇이 특정 기준에) 가깝거나 거의 같다. 예문: “그의 얘기가 어느 정도 사실에 근사하게 맞아떨어졌다.”

지난해 어느 날, 사전에서 우연히 이 뜻풀이를 찾아보고 나는 미소지었다. 오랫동안 빈칸으로 남겨둔 ‘나의 좌우명’이 그날 채워졌다. ‘근사한 사람에게 근사해지는 것’. 이제야 내가 손에 쥔 나침반이다. 내가 계속 영화를 보는 이유다. 근사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보고 나면 그들의 근사한 삶에 근사해지고 싶을 것이고,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지금보다 아주 조금, 정말 아주 조금이라도 더 근사한 사람이 되어 있을지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를 품고 나는 극장엘 간다.

김세윤 방송작가
김세윤 방송작가
산드라는 제법 근사한 인간이었다. <로드>의 아빠가 그랬던 것처럼. “당신은 좋은 사람인가요?” 관객을 향해 마지막까지 질문을 던지는 이 영화의 라스트 신은 특히 근사하다. <더 로드>의 라스트 신이 그러한 것처럼.

근사한 산드라에게 근사해지려 한다. 결국 실패할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할 수 있는 데까지는 해보려고 한다. 나도 어떻게든 ‘인간’으로 버텨 보려고 한다. 이 영화를 본 관객은 누구나 그렇게 된다. 누구나 산드라가 된다. 그녀의 짧은 ‘로드무비’가 끝난 곳에서, 저마다의 긴 ‘성장영화’가 시작되는 것이다.

김세윤 방송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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