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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혼자가 아니라는 기분은 이런 것

등록 2015-02-27 19:09수정 2015-10-23 18:40

영화 <이미테이션 게임>
영화 <이미테이션 게임>
[토요판] 김세윤의 재미핥기
“꼬마 마르슬랭 까이유는 다른 많은 아이들처럼 아주 행복한 아이로 지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불행히도, 마르슬랭은 어떤 이상한 병에 걸려 있었다. 얼굴이 빨개지는 병이었다.”

프랑스 작가 장자크 상페의 그림책 <얼굴 빨개지는 아이>는 이렇게 시작한다. “그래, 혹은 아니, 라는 말 한마디를 할 때에도 쉽게 얼굴이 빨개”지는 아이. 정말 “아무런 이유 없이 얼굴이 빨개”지고 마는 마르슬랭. 책장을 몇 장 더 넘기면 얼굴이 하나도 빨갛지 않은 아이들이 떼지어 서서 ‘얼굴 빨개지는 아이’를 놀리는 광경이 보인다.

“조금씩 마르슬랭은 외톨이가 되어 갔다. 그리고 언젠가부터는, 기마전놀이나 기차놀이, 비행기놀이, 잠수함놀이와 같은 아주 재미있는 놀이를 하며 뛰어다니는 그의 꼬마 친구들과도 어울리지 못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아이들이 자기의 얼굴 색깔에 대해 한마디씩 하는 것이 마르슬랭은 점점 견디기 힘들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혼자 노는 것을 더 좋아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책 20쪽과 21쪽에 걸쳐 그려 넣은 어느 오후 풍경. 텅 빈 공원에서 친구 하나 없이 혼자 놀고 있는 ‘얼굴 빨개지는 아이’. 아마도 그건 세상 모든 외톨이의 오후 풍경일 것이다. 남과 조금 다르다는 이유로 자꾸 외로워진 모든 이들이 오늘 하루를 살아내는 방식일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작가는 마르슬랭을 계속 혼자인 채로 내버려두지 않는다. 이 가여운 외톨이에게 어제와 다른 오후를 선물하기로 마음먹는다.

그날도 어김없이 빨개진 얼굴로 돌아오던 마르슬랭. “아앗츄우!” 재채기 소리를 듣는다. 한 소년이 집 앞 계단에 앉아 연신 재채기를 하고 있다. 마르슬랭의 이웃집에 새로 이사 온 르네 라토는 자기도 “갓난아이 때부터 아주 희한한 병”에 걸려 있다고 했다. “전혀 감기 기운이 없는데도 자꾸만 재채기를 하는 병”이라나?

아무런 이유 없이 얼굴이 빨개지는 아이와 시도 때도 없이 재채기를 하는 아이. 남과 같지 않아서 줄곧 외롭던 녀석들이 드디어 친구를 갖게 되었다. 그렇게 시작된 둘의 길고 오랜 우정을 작가는 흐뭇하게 지켜본다. 부욱, 찢어내 벽에 붙이고 싶을 만큼 아름답고 애틋한 삽화로 담아낸다. 나는 이 책을, 책상에 앉아 손만 뻗으면 바로 꺼낼 수 있는 높이에 꽂아두었다. 내 안의 비관과 우울이 마음을 야금야금 허물어 별안간 폭삭, 싱크홀처럼 커다란 구멍이 가슴에 뚫리는 날이면 슬그머니 책을 꺼낸다. 그리고 내가 가장 좋아하는 바로 이 대목을 다시 찾아 읽는다.

“마르슬랭은 감기에 걸릴 때마다 그의 친구처럼 재채기를 할 수 있다는 사실에 흡족했다. 그리고 르네 역시 햇볕을 몹시 쬔 어느 날, 그의 친구가 가끔씩 그러는 것처럼 얼굴이 빨개져 버린 것에 아주 행복한 적이 있었다. 둘은 정말로 좋은 친구였다.”

든든함이란 이런 거다. 혼자가 아니라는 기분은 이런 것이다. “으취~”. 르네의 시원한 재채기 소리에 마르슬랭의 빨간 얼굴이 웃는 낯으로 바뀌는, 이 책의 마지막 페이지 같은 것이다.

“저는 16살 때 자살하려고 했어요. 내가 비정상이며 남들과 다르다고 느꼈기 때문이죠. 저는 어디에도 끼지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 자리에 서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은, 자기가 남들과 다르다거나 자신이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다고 느끼는 그런 사람을 위한 시간입니다. 이상해도 괜찮아요. 남들과 달라도 괜찮아요. 언젠가 당신 차례가 오면, 그래서 이 무대에 서게 되면, 당신 뒤에 올 다음 사람에게도 같은 말을 해주세요.”

87회 아카데미 시상식. 영화 <이미테이션 게임>(사진)으로 각색상을 받은 작가 그레이엄 무어가 이렇게 멋진 수상소감을 남겼다. 그 순간, 그는 르네였다. 세상 모든 마르슬랭의 듬직한 친구였다. “이상해도 괜찮아, 남들과 달라도 괜찮아.”(Stay weird, stay different.) 이 한마디는, ‘얼굴 빨개지는 아이’를 미소짓게 하는 르네의 재채기 소리와도 같았다.

김세윤 방송작가
김세윤 방송작가
오늘 또 하루, 남과 다른 자신을 탓하며 좁고 긴 계단을 힘겹게 오른 모든 외톨이들에게 그레이엄 무어의 수상소감이 제법 위로가 될 것이다. 내가 <얼굴 빨개지는 아이>를 다시 꺼내 읽듯 때때로 다시 꺼내 보는 영상이 될 터이다. 그가 쓴 영화 속 대사처럼 “가끔은 생각지도 못한 누군가가 누구도 생각지 못한 일을 해내”는 법이니. 든든함이란 이런 거다. 혼자가 아니라는 기분은 이런 것이다.

김세윤 방송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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