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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대위 존 밀러의 오른손…세월호 김동수의 왼손

등록 2015-03-27 19:48수정 2015-10-23 18:30

[토요판] 김세윤의 재미핥기
한사람 구하려고 여덟명이 목숨을 건 작전. 희생자가 늘자 소대원들이 동요한다. 부대를 이탈하겠다는 병사. 그에게 총을 겨눈 병장. 그때 존 밀러(톰 행크스) 대위가 입을 연다. “난 학교 선생님이었다. 펜실베이니아 애들리라는 곳에서 작문을 가르쳤지. 지난 11년간 토머스 고등학교에 있었어. 봄에는 야구 코치도 했었다.”

병장이 총을 내려놓는다. 모두 존 밀러를 쳐다본다. 한번도 자신의 과거를 얘기한 적 없는 사람이다. 그의 원래 직업이 무엇인지를 두고 소대원들끼리 내기할 정도였다. 그런데 실은 학교 선생님이었다니. 글 쓰는 법을 가르치던 손으로 총 쏘는 법을 배워야만 했다니. 다들 할 말을 잃었다.

“고향 사람들은 내가 하는 일에 대해 잘 알지. 하지만 여기에서 하는 일은 전혀 알지 못해. 난 많이 변했어. 때로는 내 모습을 아내가 못 알아볼까봐 걱정도 돼.” 어느새 숙연해진 분위기. 대위가 계속 말을 이어간다. “난 라이언이 누군지 몰라. 녀석에 대해 아는 게 하나도 없어. 하지만 상관없어. 라이언을 찾아 집으로 돌려보내야만 내가 돌아갈 수 있다면, 그렇게 해야지.”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1998·사진)에서 주인공 존 밀러의 오른손은 영화 내내 흔들리고 떨린다. 분필 대신 총을 잡고 있는 그 손바닥이 진짜 전쟁터. 라이언을 찾아 집으로 돌려보내야만 그 역시 (예전의 자신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그의 떨리는 오른손이 가장 잘 알고 있다.

여기, 왼손을 떠는 남자가 있다. “손이 자기 맘대로 움직인다”며 고통스러워한다. 원래 운전대를 잡던 손이 그날 아침 소방 호스를 잡은 뒤 그리되었다. 수십명의 생사가 그 손끝에 매달려 있었다. 20여명을 끌어올렸지만 그 이상은 무리였다. 결국 호스를 놓았다. 왼손이 빈손으로 남겨졌다. 그로부터 1년 가까운 시간이 흐른 어느 날. 남자는 자신의 손목을 칼로 그었다. 문득 왼손을 보는 순간 “이런 쓸모없는 손을 갖고 있어서 뭐하나” 하는 생각이 들어 잘라내려 했다고, 나중에야 그가 털어놓았다.

육군 대위 존 밀러의 오른손. 세월호 의인 김동수의 왼손. 라이언 일병을 구했지만 더 많은 사람을 구하지 못해 미안했던 오른손. 20명 넘게 살렸지만 더 많은 사람을 살릴 수 없어 참담했던 왼손. 세상은 이제 전쟁이 끝났다고 말하지만 그들의 손바닥은 여전히 전쟁터. 가장 쓸모있는 일을 해낸 사람들이면서 더 쓸모있는 일을 해내지 못했다며 자책하는 두 사람이 내 마음 속에서 하나로 포개진다. 남몰래 떨리고 흔들리는 그들의 손이 안쓰럽다. 존 밀러의 오른손은 다시 분필을 쥐지 못했다. 김동수의 왼손은 다시 운전대를 잡을 수 있을까?

다가오는 4월1일은 장국영의 사망 12주기. 그가 그리워 <아비정전>을 다시 보았다. 어김없이 그 장면이 찾아왔다. 벌써 며칠째 수리진(장만옥)을 찾아와 무작정 말을 거는 아비(장국영). 딱 1분만 같이 봐달라는 아비의 부탁에, 할 수 없이 함께 손목시계를 들여다보는 수리진. 째깍째깍. 그렇게 1분이 흐른 뒤 아비가 하는 말. “1960년 4월16일. 3시 1분 전. 우리는 1분 동안 함께 있었어. 난 이 소중한 1분을 잊지 않을 거야. 이제 우린 친구야. 그건 당신이 부인할 수 없는 엄연한 사실이지. 왜냐면… 이미 지나간 과거가 됐으니까.”

초침이 시계를 한 바퀴 도는 시간. 아비의 우주가 수리진의 우주를 한 바퀴 도는 시간. 3시 1분 전. 하필이면 4월16일. 나중에 수리진은 이때를 다시 떠올리며 말한다. “1분이 쉽게 지나갈 줄 알았는데, 영원할 때도 있더군요.”

1년 전. 하필이면 4월16일. 초침이 시계를 몇십 바퀴나 도는 동안 한 사람의 왼손이 수많은 사람의 우주를 붙잡아주었다. 그보다 더 쓸모있는 손을 나는 알지 못한다. 그가 자신의 손을 두번 다시 ‘쓸모없는 손’이라고 느끼지 않으려면, 그 손이 더는 떨지 않고 다시 예전처럼 운전대를 잡을 수 있으려면,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까? “왜 그때 일을 못 잊느냐는 사람들이 있어요. 학생들을 보면 그 학생들이 생각나고, 창문을 보면 세월호 창문에 (매달려) 있는 아이들이 생각나는데 어떻게 그 일을 쉽게 잊겠어요.”(김동수)

김세윤 방송작가
김세윤 방송작가
‘그만 잊으라’는 이야기만은 하지 말아야 한다. 세상엔, 쉽게 지나갈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은 것들이 있다. 좀처럼 잊혀지지 않는 순간이라는 게 있다. 공교롭게도 둘 다 4월16일. 수리진과 아비의 1분처럼. 그의 왼손이 기억하는 그날 아침처럼.

김세윤 방송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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