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추리작가 애거사 크리스티 소설의 등장인물인 제인 마플은 세인트 메리 미드라는 조용한 시골 마을에 사는 할머니 탐정이다. 사진은 영국 ITV에서 방영했던 ‘애거사 크리스티 : 미스 마플’ 시리즈에서의 미스 마플.
* 영국 추리작가 애거사 크리스티의 소설에 등장하는 가상의 인물 제인 마플에 보내는 편지입니다.
미스 제인 마플 여사께
오늘같이 몹시 춥고 조용한 연말엔 여사님 생각이 많이 나요. 어쩐지 세인트 메리 미드의 작은 집 난롯가에서 잡지를 읽거나 분홍색 털실로 뭔가를 열심히 뜨고 계실 것 같거든요. 혹은, 여행지나 지인의 저택에 방문했다가 살인사건에 휘말려 범인을 쫓고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그렇다면 ‘다정하고 인정 많게 생긴 하늘색 눈’을 반짝이며 주변 사람들의 내면을 꿰뚫고 계시겠지요?
인사가 늦었네요. 저는 고등학교 때까지 장래 희망이 탐정이었던 마플 여사님 팬이랍니다. 초딩 때부터 ‘제시카의 추리극장’을 챙겨보며 저도 언젠가는 제시카 같은 사람이 되어야지 꿈꿨던 것 같아요. 조금 더 자라나서는 제시카의 모델이 바로 여사님이란 걸 알게 됐어요. 그리고 특유의 지혜와 통찰력으로 사건을 해결해 나가는 12편의 장편소설과 20편의 단편에 실린 여사님의 활약상을 보고는 홀딱 마음을 빼앗기고 말았지요.
사람들은 자주 마플 여사님을 ‘안락의자형 탐정’이라고 부르지만 제 생각은 좀 달라요. “작은 마을에도 많은 악이 숨어있다”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시며 세인트 메리 미드의 구석구석을 누비고, 사건 현장에는 언제나 제일 먼저 나타나서 (때론 경찰보다 먼저) 사건을 조사하시곤 하잖아요. <패딩턴발 4시 50분>(1957년)에서도 친구가 목격한 살인사건 조사를 위해 직접 패딩턴발 기차에 올라 ‘살인 재현’까지 하셨었죠. 이 작품에서는 잠입수사를 하는 ‘조수’ 루시 아일스배로와의 케미도 빼놓을 수 없겠네요. 살인사건을 해결하는 두 명의 여성 탐정이라니, <애거사 크리스티 완전 공략>(한겨레출판)에서 “미스 마플은 여성 영웅 캐릭터의 원류”라고 했던 지은이 시모쓰키 아오이씨의 주장에 완전히 공감합니다. 집안 형편이 좋지 않은 어린 아가씨들이 사회에 나갈 수 있도록 집안일을 가르치고 후원한 것도 당신이었습니다. 그 중 한 명인 글래디스가 <주머니 속의 호밀>(1953년)에서 희생됐을 때, 바로 그 ‘영웅’이 등장했었지요.
이 말씀도 꼭 드려야겠네요. 빅토리아 왕조풍 옷차림을 하고 뜨개질거리를 가방에 들고 다니는 다정한 이웃집 할머니의 모습도 무척 좋아하지만, 여사님의 활약에서 가장 짜릿한 부분은 바로 이때랍니다. “이제 경계를 풀어서 범인에게 덫을 놔야겠어요.” 바로 범인을 잡을 함정을 파자고 제안하시는 순간. 자신을 스스로 네메시스(Nemesis·복수의 여신)라 칭하며, 약자들을 보호하고 범인을 단죄하는 모습에서는 그야말로 ‘걸 크러시’가 오지 않을 방도가 없지요.
사흘 뒤면 한 살을 더 먹게 되네요. 엎어지면 곧 마흔이 될 나이가 되었어요. 태연한 척하고 있지만 ‘이대로 괜찮을까’ 하는 불안감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에요. 나이를 더 먹어도 지금처럼 혼자 잘 지낼 수 있을까요? 이런 뒤숭숭한 생각 끝에 떠오른 미스 마플, 당신은 결혼을 하지 않아도, 아기가 없어도, 혼자여도 충분했어요. 이웃들에게 환영받고, 늘 좋은 친구들이 함께 했죠. 장래희망을 고쳐 적을 때가 온 것 같아요. 그냥 탐정이 아니라 ‘할머니’ 탐정이 되는 거죠. 여기서 방점은 당연히 ‘할머니’에 있습니다. 지혜롭고 귀여운 할머니, 바로 미스 마플 당신과 같이 늙는 것. 새해 목표로 꽤 그럴듯하지 않나요.
김지숙 기자
suoop@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