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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방송·연예

[편집국에서] 딸과 나의 우울한 미래 / 신승근

등록 2016-09-11 19:00수정 2016-09-11 19:19

신승근
라이프에디터

지난해 격렬한 사춘기를 겪던 중학생 딸아이는 이런 얘기를 자주 했다. “공부해 뭐해. 어차피 좋은 대학 나와도 다 편의점 알바나 비정규직인데.” “한겨레 기자 아빠님, 기자시라면서요. 그런데 학교에서 애들이 진짜 무슨 생각 하면서 사는지, 현실을 알기나 하세요.” 속이 문드러졌지만, 스스로 위로했다. 또래 아이들이 밤낮없이 학원으로 돌 때 ‘넌 한가하게 뭐 하냐’는 지적질에 둘러대는 핑계, 친구들과 관계가 잘 풀리지 않아 상처받은 어린 영혼의 안타까운 항변이라고. ‘오죽하면 ‘중2병’이라 했겠어, 딱 그럴 나이인데.’

이젠 그 거친 폭풍을 넘어선 딸아이가 얼마 전부터 이런 말을 한다. “아빠, 난 결혼 안 할 거야. 결혼해서 뭐해, 나 살기도 바쁜데. 애를 낳아서 또 어떻게 키워.” 이렇게 답했다. “그래, 마음껏 인생을 즐겨. 남자에게, 자식에게 평생 얽매일 필요 없어.” 하지만 내심 충격을 받았다. ‘열다섯살 딸아이 입에서 어떻게 이런 얘기가?’ 먼저, 좀 반성했다. 우리 부부가 그리 단란한 가정을 구현하지 못했고, 경제적 문제로 언성을 높이기도 하면서 강퍅하게 살았구나. 물론, 반성과 개선은 별개다.

그런데, 지난 8일 밤 우연히 딸아이가 또래 친구와 하는 통화 내용을 들었다. “그런데 야~. 생각해 봐. 난 우리 아빠 수준으로만 살면 성공한 거라 생각해. 그런데 우리가 아빠들처럼 사는 게 쉽겠어. 우리 때는 노력해도 안 돼~.”

그제야 더욱 우울한 상상을 시작했다. 결혼회피, 청년실업, 비정규직, 워킹맘과 육아의 고통…. 이런 사회문제가 열다섯살 딸들의 삶에 영향을 미친다. 그 또래가 지금 상상하는 미래는 우울하고 회색일 수도 있겠구나. 그리고 좀 더 현실적인 의문을 품는다. ‘다 잘될 거야. 미리 걱정하지 마’라는 말에 위안받고 ‘모든 건 너 하기 달렸어. 남 탓하지 마’, ‘그래서 남보다 더 치열하게 노력해야 돼’라는 어른들의 경고를 잘 따른다면 우리 딸들의 미래는 정말 행복해질 수 있을까.

솔직히 내 딸에게 ‘특별한 성공신화’를 기대한 적 없다. 다만 정규직, 하위직 공무원, 이런 정도는 ‘기회의 문’이 좁겠지만 아주 무리한 주문은 아닐 거라 막연히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무리한 기대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전체 노동자의 44.7%가 비정규직이고, 이들은 정규직에 견줘 49.5%에 불과한 임금을 받는(2015년 기준) 게 현실인데 비정규직은 계속 늘어간다. 더욱이 여성 노동자 임금은 남성 노동자 임금의 63.4%에 그친다. 남녀평등 지수는 세계 최하위 수준인 145개국 중 115위, 동일 직종 남녀의 임금격차는 116위, 여성의 경제활동 참여 기회는 90위(2015년 세계경제포럼 <성평등 보고서>)다. 지금도 ‘헬조선’이라고 아우성인데, 우리의 딸들이 기자인 아빠도 잘 모르는 중·고등학교라는 정글을 지나 대학을 졸업한 뒤 직면할 세상은 지금보다 아름다울까. 딸들의 우울한 상상처럼 여성은 아무리 노력해도 비정규직, 알바노동자로 살아가며 혼밥 먹고, 각자 분리된 공간에서 혼자라도 생존하기 위해 지금보다 힘겨운 하루하루를 살아가지 않을까.

이 대목에 나는 또 갈등한다. 동원 가능한 모든 재화를 딸아이에게 몰아주며 올인한다면, 더 많은 물량과 더 좋은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좀 더 애쓴다면 그래도 내 딸은 그 암담한 대열에서 열외일 수 있지 않을까. 그런데 솔직히 그것도 장담은 못하겠다. 별다른 노후대책 없이 살아가는 내가 그런 무리수를 둘수록, 나의 노년은 더욱 빈곤해질 위험이 크다. 일단, 지금은 마음속으로만 결심한다. ‘대학 입학 때까지만 도와주고 딱 끊자. 나도 살아야지.’

sksh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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