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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영화·애니

강요받는 당신, 웃는 게 웃는 게 아니야

등록 2013-04-05 19:45수정 2013-07-15 16:10

영화 <웃는 남자>
영화 <웃는 남자>
[토요판] 김세윤의 재미핥기
그가 웃고 있다. 입이 귀에 걸렸다. 항상 그렇다. 슬퍼도 웃고 아파도 웃고 화가 나도 웃는다. 그가 어릴 적에, 누군가 일부러 그를 웃고 있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입의 양쪽 가장자리를 칼로 찢어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미소를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입이란 건 자신의 뜻대로 귀에 걸어야 보기 좋은 미소가 되는 법인데 남이 억지로 귀에 걸어놓았으니 흉측할 수밖에. 강요받은 웃음. 사라지지 않는 미소. 그로테스크는 이럴 때 쓰라고 있는 말이다.

영화 <웃는 남자>(사진)는 같은 제목의 소설이 원작이다. 평생 억지웃음 짓고 살아야 하는 남자 그윈플렌이 주인공이다. 빅토르 위고가 1869년에 발표한 이 작품은 17세기 영국에서 실제로 호황을 누렸다는 어린이 인신매매단 ‘콤프라치코스’에 대해 제법 긴 설명을 하고 있다. 당시 귀족들 사이에서 생김새가 기이하거나 신체가 기형인 아이들을 몸종이나 광대로 만들어 곁에 두는 게 유행이었는데, 멀쩡한 아이들까지 귀족에게 팔아넘기기 위해 콤프라치코스가 저지른 수많은 만행을 열거한다. 그중 하나가 바로 칼로 만들어낸 미소. “그윈플렌은 웃으며 사람들을 웃겼다. 하지만 그는 웃지 않았다. 그의 얼굴이 웃었지, 그의 생각은 웃지 않았다. 우연, 혹은 기이하고 특별한 기술이, 그에게 만들어 준, 전대미문의 얼굴이 홀로 웃었다.”

대체로 연민, 때때로 분노를 자아내는 이 소설은 1928년 무성영화 <웃는 남자>로 만들어졌고, 그 영화를 본 그래픽 노블 <배트맨>의 작가가 그 유명한 악당 캐릭터 ‘조커’를 만들어냈다. 박쥐 가면 뒤에 숨은 영웅에 맞서 자신의 미소 뒤에 숨어버린 악당. 자신의 얼굴이 곧 자신의 가면이 되어버린 남자. “왜 그렇게 심각해?” 낄낄대며 칼을 들이대던 고담 시티의 무시무시한 악당을, 17세기 영국에 실존했던 ‘레 미제라블’(비참한 사람들)의 환생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21세기 대한민국에서 그들의 또다른 환생을 만난다. 백화점에서, 은행에서, 레스토랑에서, 거의 모든 계산대와 거의 모든 공공기관 창구에서, 오늘도 최선을 다해 웃고 있는 그윈플렌의 후손들과 마주친다.

그녀는 웃고 있다. 입이 귀에 걸렸다. 항상 그렇다. 바빠도 웃고 아파도 웃고 당황해도 웃는다. 그녀가 신입일 때, 회사가 일부러 그녀를 웃고 있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입의 양쪽 가장자리를 하루 종일 긴장시켜 좀처럼 지워지지 않는 미소를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입이란 건 자신의 뜻대로 귀에 걸어야 보기 좋은 미소가 되는 법인데 다른 사람이, 인사고과가, 회사방침이, 고용불안이, 고객불만이, 그리고 쥐꼬리만한 월급이, 그녀의 입을 억지로 당겨 귀에 걸어놓았으니 불편할 수밖에. 강요받은 웃음. 사라지면 큰일나는 미소. ‘또 하나의 가족’ 앞에서 종일 웃고 서 있기 위해 자신의 진짜 가족들 앞에서는 늘상 찌푸린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

그윈플렌처럼 그들도 “그 웃음에 전혀 관여하지 않았다.” 그윈플렌에게 그랬듯이 그들의 얼굴에도 다른 사람이 “웃음을 영원히 고착시켜 놓은 것”이다. “그것은 자동적인 웃음”이고 또한 “고착된 것이니, 불가피한 웃음”이다. 한마디로, 내가 웃는 게 웃는 게 아닌 것이다.

프랑스 작가 소피 쇼보는 <미소>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한다. “소위 사회적 경쟁이라는 미명하에 발버둥치고 있는 우리의 집단 최면 상태로부터 미소는 추방된다. 거기서 미소를 짓는 것은 번거로운 일이다.” 지구상 그 어떤 나라보다 사회적 경쟁이 치열한 대한민국의 기업과 기관들은 그래서 그 ‘번거로운 미소’를 대신 지어줄 사람을 고용한다. 오늘도 “그의 얼굴이 웃었지, 그의 생각은 웃지 않”으며, ‘친절 마케팅’이라 불리는 “기이하고 특별한 기술이, 그에게 만들어 준, 전대미문의 얼굴이 홀로” 웃고 있는 나라. 확실히 그로테스크는 이럴 때 쓰라고 있는 말이다.

김세윤 방송작가
김세윤 방송작가
니체가 말했다. “세상에서 인간보다 큰 고통을 느끼며 살아가는 존재는 없다. 그래서 웃음을 발명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우리 시대는 새로운 종류의 웃음을 발명하기 위해서 남보다 더 큰 고통을 느끼며 살아가는 존재를 또 새로 발명해냈다. 백화점에서, 은행에서, 레스토랑에서, 거의 모든 계산대와 거의 모든 공공기관 창구에서, ‘친절’을 위해 ‘관절’을 혹사하며 ‘또 하나의 가족’ 앞에서 하루 종일 ‘웃는 남자’들과 앉으나 서나 ‘웃는 여자’들. 미소를 잃지 않을 만한 근로조건을 만드는 대신, 미소를 잃으면 일자리를 잃게 될 거라고 겁박하는 21세기 한국의 고용주들이 17세기 영국의 콤프라치코스와 다를 게 뭔가. 이게 웃는 건가. 이게 사는 건가.

김세윤 방송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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