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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영화·애니

땅속에는 170여만명의 ‘세진이’가 산다

등록 2013-04-26 19:16수정 2013-07-15 15:59

영화 <내 깡패 같은 애인>
영화 <내 깡패 같은 애인>
[토요판] 김세윤의 재미핥기
누군가 벨을 눌렀던 것 같다. 내가 문을 열어준 것도 같다. 그다음부터 기억나질 않는다.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잠옷 바람으로 땅바닥에 누워 있었다. 강강술래 대형으로 나를 둘러싸고 내려다보는 동네 사람 네댓명의 얼굴이 작은 동그라미를 그리며 눈앞에 떠 있었다. 어떤 아줌마가 억지로 내 입을 열어 동치미 국물을 들이부었다. 연탄가스를 마셨을 땐 그게 특효라고 했다.

1980년대 중반 우리 집은 지하 셋방을 전전하고 있었다. 갑자기 가세가 기울었고 ‘지상의 방 한 칸’ 마련하는 게 쉽지 않았다. 그래도 자식들을 좋은 학교에 보내야 한다며 끝끝내 강남 8학군을 고집하신 덕분에, 강북이었으면 반지하 셋방을 구했을지 모를 돈으로 반층 더 내려가 강남의 지하 셋방을 얻은 부모님. 그 결과, 또래 친구들 몇몇이 부탄가스를 마시고 손에서 레이저를 쏠 때 당신의 ‘귀한 아들’은 잠결에 연탄가스를 마시다 끌려나와 동치미 국물로 입가심하게 되었나이다. “역시 지하실은 사람 살 곳이 못 된다”며 혀를 차던 아줌마들이 각자 자신들의 거처로 돌아간 뒤, 딱히 갈 곳이 없던 초등학생은 연탄가스가 미처 다 빠지지 않은 빈집으로 걸어내려갔나이다. 아직 귀가하지 않은 식구들을 기다리며 다시 낮은 곳에 임하였던, 그날의 그 좁고 가파른 계단을 소년은 오랫동안 잊지 못하였나이다.

영화 <내 깡패 같은 애인>(2010)은 주인공 세진(정유미)이 고향을 떠나 서울 가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이제 막 대학 졸업하고 회사에 들어간 세진은 꿈에 부풀어 있다. 처음으로 연애라는 것도 하게 된다. 하지만 영화 시작하고 10분 만에 회사는 부도나고 연애는 끝이 난다. 다시 취직하는 건 쉽지 않고 가진 돈 역시 금세 바닥난다. 결국 세진은 도시 변두리의 가파른 언덕길, 어두컴컴한 반지하 셋방에 둥지를 틀었다.

영화 속 세진이네 집으로 들어가는 계단이 내 어린 날의 그 좁고 가파른 계단을 닮았다. 세진이가 빼꼼히 창문 열고 밖을 구경하던 모습은 우리 집 살림살이가 나아져서 연립주택 지하실을 벗어나 드디어(?) 반지하 셋방으로 이사간 날 내 모습과 닮았다. 아스팔트와 바로 맞닿은 창문 앞으로 지나는 사람들 모습이 만화영화 <톰과 제리>의 주인 아줌마 같았다. 상반신은 보이지 않는, 오직 하반신만이 허락된 풍경.

내가 겪은 가난은 짧았다. 곧 셋방살이를 면했다. 하지만 수많은 원체험을 쌓아가는 성장기, 사람들의 정수리를 굽어살피며 자란 아이와 사람들의 ‘발모가지’를 우러러보며 자란 아이가 나중에 커서 세상 보는 눈이 똑같을 순 없을 것이다. 그러니까 드라마 <직장의 신>을 보다가, 열심히는 사는데 남들처럼 잘사는 게 쉽지 않은 주인공 주리를 보다가, 배우 정유미가 참 예쁘게 그려낸 또 한 명의 여리고 착한 청춘 세진이를 떠올리며 새삼 안쓰러워하는 까닭은, 다행히(!) 내 인생에도 짧게나마 세진이와 같은 눈높이로 세상을 보던 때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햇살 한 줌, 바람 한 줄기가 아쉬운 지하 셋방에 차곡차곡 쌓여가는 어떤 눅눅한 열패감을 조금은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게 얼마나 나쁜 종류의 원체험인지도 아주 조금은 안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최근에야 알게 되었다. “지하 셋방이 본격화된 것은 1980년대 주택 부족과 부동산가격 폭등이 심화되면서”부터이며, “임대 혹은 분양 면적의 극대화가 목적이니 주거에 적합한지는 고려사항이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건축법상 용적률 계산에서 지하가 제외되기 때문에 수많은 지하 셋방이 생겨나게 되었다”는 사실을.(<한겨레> 2011년 8월4일. 칼럼 ‘낮은 목소리’)

김세윤 방송작가
김세윤 방송작가
얼마 전에야 보게 되었다. 2012년 현재 우리나라에서 반지하에 거주하는 가구가 50만8000가구, 햇빛이 전혀 들지 않는 지하에 거주하는 가구가 13만가구라는 통계를.(통계연구원, ‘한국의 사회동향 2012’). 어림잡아 이 땅에는 63만여가구, 170여만명의 세진이가 땅속에 산다. 이 숫자를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바라보는 사회라면 끔찍하다. “사람 살 곳이 못 된다”는 지하실에서 이렇게 많은 사람이 살아가는 모순이 20년 넘도록 반복되는 현실. 이게 아무렇지 않은 일이 되어서는 정말 안 되는 것이다.

고층빌딩 가득한 도시에서 지하 셋방의 존재는 쉽게 잊혀진다.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의 존재도 함께 잊혀진다. 살려달라고 소리치기 위해 철탑에 올라야만 하는 나라에서 살아남기 위해 말없이 지하로 떠밀린 사람들의 처지야 하물며…. 누군가 열심히 부동산을 짓는 동안 누군가는 간절히 집을 찾고 있다. 매일매일 더 가파른 계단을 내려가고 있다.

김세윤 방송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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