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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영화·애니

함께 밥을 먹어야 가족이다

등록 2013-05-10 19:24수정 2013-07-15 15:50

영화 <고령화 가족>
영화 <고령화 가족>
[토요판] 김세윤의 재미핥기
한 남자가 스스로 생을 마감하려고 한다. 넥타이 매고 출근할 일이 없는 백수 생활에 지쳐 그 넥타이로 목이나 매야겠다고 마음먹은 것이다. 삶의 마지막 순간, 발가락 끝으로 잠시 버티고 서서 머뭇거릴 때 엄마의 전화를 받는 남자. “집에 와서 밥 먹고 가.” 자식은 목이 멘다. 그래서 목을 매지 못한다. 영화 <고령화 가족>에서 엄마(윤여정)는 당신도 모르는 사이 그렇게 아들 인모(박해일)를 살려냈다.

<살인의 추억>에서 박두만 형사가 그의 양볼을 움켜쥐고 “밥은 먹고 다니냐?”고 물었을 때, 아무 말 없이 터널 속으로 사라졌던 연쇄살인사건 용의자 박해일은 정확히 10년 뒤 엄마에게서 같은 질문을 받았다. 이번엔 도망치지 않았다. 죽기 전 마지막으로 엄마가 해준 밥을 먹고 싶었다. 그런데 다음날도, 그다음 날도 엄마가 해준 밥을 먹게 되었다. 엄마가 해준 밥을 매일매일 먹다 보니 매일매일 죽을 짬이 나지 않았다.

인모가 집밥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눌러앉은 뒤, 이제 막 두 번째 이혼을 감행한 딸 미연(공효진)도 다시 집에 기어 들어온 뒤, 여기에 몇년 동안 집 밖으로 기어 나간 적 없는 백수 장남 한모(윤제문)까지 합세해 세 남매가 매일 같은 밥상 앞에 둘러앉게 된 뒤, 이 가족은 하여간 영화 내내 어지간히 먹어댄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삼겹살에 소주를 곁들이며 흰 쌀밥 위에 쉰 김치를 얹어 입에 욱여넣는 이 ‘먹방’의 화신들을 보면서, 제목을 <고열량 가족>이나 <간경화 가족>으로 바꿔야 하는 게 아닌가, 잠시 엉뚱한 생각도 하게 되었다.

그러고 보니 김태용 감독의 영화 <가족의 탄생>도 ‘먹방’으로 치면 만만치 않은 영화였다. 오랜만에 누나 집을 찾아온 동생 형철(엄태웅)이 제일 먼저 한 일. 누나 미라(문소리)와 함께 밥을 먹는 것이었다. 죽음을 앞둔 매자(김혜옥)씨가 딸 선경(공효진)과 마지막으로 한 일. 역시 함께 밥을 먹는 것이었다. <좋지 아니한가>에서 집 나갔던 엄마가 돌아온 날, 태연하게 밥상에 끼어든 엄마를 다른 식구들이 타박하지 않은 것처럼. <괴물>에서 괴물에게 잡혀간 현서가 별안간 밥상에 끼어들어 같이 밥을 먹을 때, 가족 누구도 그걸 이상하게 바라보지 않던 그 장면처럼. <가족의 탄생>에서도 별로 친해 보이지 않는 사람들끼리 밥은 잘도 같이 먹었고, 그럴 때마다 늘 새로운 가족이 탄생하곤 했다.

영화평론가 이동진은 이 영화에서 가족이 “설혹 불편하더라도 함께 밥을 먹어야 하는 관계로 그려지는 것”에 주목하면서, 많은 한국 영화에 이와 유사한 장면이 꾸준히 등장하는 현상을 언급한 적 있다. 그때 김태용 감독은 이렇게 대답했다. “(우리 세대) 감독들이 비슷한 시기를 지나고 유사한 경험들을 하면서 무의식적으로라도 가장 기본적인 것을 함께 나누는 행위에 대한 존경심 같은 것을 갖게 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이동진의 부메랑 인터뷰-그 영화의 비밀>)

가장 기본적인 것을 함께 나누는 행위에 대한 존경심. 그것이 우리 시대의 영화가 그렇게 열심히 “밥은 먹고 다니냐”고 묻는 이유다. 서로에 대한 측은지심을 쉰 김치처럼 척, 그 한마디 위에 얹어 떠먹여주면서 새삼 ‘밥심’의 의미를 생각하게 하는 까닭이다. 우리가 가족을 부를 때, 먹을 식(食)에 입 구(口)를 더해 식구(食口)라고 부르게 된 것도, 아마 “가장 기본적인 것을 함께 나누는” 자들끼리의 묘한 연대감 때문이겠지. 그러므로 가장 기본적인 것도 함께 나누려 하지 않는 사람들이 스스로를 아무리 ‘또 하나의 가족’이라고 우겨도, 결국엔 ‘또 하나의 가식’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겸상을 불허하고 나눔을 외면하고서는 진짜 가족, 진짜 식구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김세윤 방송작가
김세윤 방송작가
일본 애니메이션 <썸머워즈>에는 27명 대가족이 함께 밥 먹는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본 뒤, 조용히 세상과 이별하는 할머니가 나온다. 그분이 남긴 유언을 한 글자 한 글자 다시 혀끝에 올려 음미해 본다. “가족끼리는 손을 놓지 말아야 한다. 힘들고 괴로운 때가 와도 변함없이 가족 모두 모여서 밥을 먹거라. 가장 나쁜 것은 배가 고픈 것과 혼자 있는 거란다.”

힘들고 괴로운 때가 와도 같이 밥을 먹어야 가족이다. 배고픈 사람을 혼자 두지 않아야 식구다. “밥은 먹고 다니냐?” 누군가 내게 전화 걸어 안부를 묻는 것만으로도 제법 기운이 날 때가 있으니. 때로 우리는 작은 ‘관심’에서 큰 ‘밥심’을 얻기도 하는 것이다.

김세윤 방송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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