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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영화·애니

‘빵’과 ‘장미’가 떠났다

등록 2013-09-13 19:25수정 2013-09-15 11:10

영화 <빵과 장미>
영화 <빵과 장미>
[토요판] 김세윤의‘ 재미핥기’
1997년 겨울의 일이다. 학교 졸업하고 1년 넘게 빈둥대던 나에게 선배가 말했다. “나 좀 도와줄래?” 선배는 어떤 대통령 후보의 비서라고 했다. 여비서가 등장하는 야릇한 영화를 하도 많이 본 탓인지 덩치 큰 남자 선배의 그 직책이 퍽 낯설었지만, 그가 모시는 후보의 이름만은 낯설지 않았다. 각종 집회에 연사로 나선 그를 먼발치에서 몇번 보았기 때문이다.

권영길. 국민승리21의 대통령 후보. 하지만 반가움보단 아쉬움이 더 컸던 그와의 첫 만남. 어떤 아쉬움이냐면, 더 잘생긴 사람이 후보라면 좋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었다. ‘혁명의 완성은 얼굴’이란 걸 입증한 체 게바라 수준까진 아니어도 최소한 백기완 할아버지처럼 기백 넘치는 인상이면 좋을 것을. 권영길은 그냥, 어릴 적 물체주머니 하나 사면 쫀득이 몇개 덤으로 손에 쥐여주던, 수완 좋다는 소리는 평생 듣지 못하고 그저 사람 좋다는 소리만 듣고 사셨을 학교 앞 문방구 아저씨를 생각나게 만들었다. 한마디로 그는 대중에게 어필하는 후보가 아니었다. 국민승리21도 언론이 관심 쏟을 만한 세력이 아니었다. 그래서 고심 끝에 묘안을 짜냈다고 했다.

매일 아침 모든 일간지와 지상파의 정치부장 데스크에 보도자료와 함께 장미 한송이를 갖다 놓는 게 묘안이라니! 좋게 말하면 홍보였고 불쌍하게 말하면 구걸이었으며 솔직히 말하면 안간힘이었다. 나는 “이게 정말 한국 진보세력이 할 짓입니까?”라며 꽃을 집어던지지 않을 만큼만 천성이 몹시 착하고 순한 후배들로 일명 ‘아침 장미’팀을 꾸렸다. 추워서, 혹은 숫기가 없어서 덜덜 떨리는 손으로 매일 꽃 한송이 들이미는 가련한 자원봉사자들이 안쓰러웠는지 몇몇 마음 약한 정치부장들이 옜다, 칼럼 하나 받아라, 불우한 후보에게 따뜻한 온정의 기고를 해주기도 하였으니, 그 ‘묘안’이 아주 쓸모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모든 정치부장이 우리를 긍휼히 여긴 것은 아니었다. 누구라고 말은 안 하겠지만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를 유행시킨 그분의 박대를 특히 잊을 수 없다. 차라리 짜증을 내며 내쫓는 편이 나았다. 내가 마치 투명인간인 것처럼, 내미는 꽃도 받지 않고 끝까지 눈길 한번 주지 않던 그 사람. 벌겋게 뺨이 달아오른 채로 우두커니, 산세비에리아 화분보다 못한 사물로 한참 동안 벌서듯 서 있다 나온 그때의 모멸감은 쉽게 지워지지 않는 트라우마로 남았다. 그래서 몇년 뒤 영화 <빵과 장미>(2000)를 보면서 불현듯 그날의 기억이 떠올라 내 뺨은 다시 한번 붉게 달아올랐던 것이다.

영국의 거장 켄 로치 감독이 연출한 이 영화에서 청소노동자 마야는 출근 첫날 선배에게 일을 배운다. 근사한 빌딩에서 일하는 잘난 분들은 바닥에 쪼그려 앉아 열심히 청소하는 두 사람을 모른 척 지나다닌다. 마치 길가에 뒹구는 쓰레기를 피해가듯 능숙하게 그들을 피해가며 눈인사조차 건네지 않는 사람들. 그때 마야에게 선배가 말한다. “이 유니폼의 비밀이 뭔지 알아? 우리를 투명인간으로 만들어준다는 거야.”

마야 같은 수많은 투명인간 노동자들의 투명망토를 벗겨주기 위해 권영길은 선거에 출마했다. 우리의 후보를 투명인간으로 만들지 않으려고 나와 후배들은 투명인간 취급을 받으면서도 매일 아침 ‘101번째 프러포즈’를 연출했다. 그해 대선에서 권영길 후보는 득표율 1.2%를 기록했다. 몇해 뒤 다시 대통령선거에 나와 3.89%의 특표를 했고 다시 몇해 뒤엔 9명의 ‘동지’들과 함께 국회의원이 되었다. 내가 심은 장미 한 송이가 이제야 꽃을 피우는구나, 괜히 뿌듯해지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또다시 몇해가 지난 지금, 진보정당은 끝내 와해됐고 진보세력은 다시 투명인간이 되었다. 그리고 권영길이 정계은퇴를 선언했다.

1941년생, 정치인 권영길과 동갑내기 영화감독 미야자키 하야오가 공교롭게도 비슷한 시기 은퇴를 발표했다. 그는 언젠가 이렇게 말했다. “영화를 보고 난 뒤, 1층으로 들어온 사람이 2층으로 나가는 듯한 느낌을 갖게 하는 영화가 가장 좋습니다.” 딱 그
김세윤 방송작가
김세윤 방송작가
만큼. 더도 말고 딱 한 층의 차이만큼. 서로 다른 각자의 방식으로, 우리를 여기와는 다른 어떤 세상으로 데려가려 했던 두 노장에게 마음으로나마 장미 한송이를 건넨다. <빵과 장미>에서 노동자들이 외친 구호처럼, 우리에겐 빵이 필요하지만 장미도 포기할 수 없으니. 권영길에게 건 기대가 내 젊음의 정치적 빵이었다면 미야자키 하야오 영화는 내 청춘의 정서적 장미였으니.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닐 수 없는” 작금의 사건들은 잠시 잊고, 오늘 다시 <빵과 장미>를 봐야겠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지난 영화를 차근차근 꺼내봐야겠다.

김세윤 방송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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