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문화 영화·애니

쓸데없이 진지했던 ‘그때’가 그립다

등록 2013-11-29 19:47수정 2013-11-30 18:36

<러브레터>(1995)
<러브레터>(1995)
[토요판] 김세윤의 재미핥기
 눈밭을 걷는 여자의 걸음이 빨라진다. 두 발이 마음의 속도를 미처 따라가지 못해서 픽, 앞으로 고꾸라진다. 하지만 씩씩하게 일어나 빨간 스웨터에 묻은 눈을 대충 털어내고 다시 뛰기 시작하는 여자. 숨이 차올라 더 달릴 수 없는 지경이 되어서야 멈춘다. 그러고는 저 멀리 우뚝 서 있는 산봉우리를 향해서, 아니 2년 전 그 산봉우리가 집어삼킨 자신의 연인을 향해서 소리친다. “잘 지내죠? 저는 잘 지내요.”

 그녀의 애절한 외침이 겨울산에 울려퍼지기 한 해 전, 어느 좁고 낡은 아파트 욕실에 우두커니 앉아 있는 한 남자가 있었다. 뚜껑 덮인 변기 위에 흰색 속옷 차림으로 걸터앉은 남자는 손에 든 비누에게 말을 걸었다. “너무 야위었어. 전엔 통통했는데. 왜 그래? 자신감을 가져.” 이번엔 물이 뚝뚝 떨어지는 걸레를 집어든 남자. “그만 울어. 계속 울기만 할 거야? 강해져야지. 왜 축 처져 있는 거야?” 남자는 결국 젖은 걸레를 비틀어 ‘눈물’을 모두 짜냈다. 추위에 떨고 있는(?) 빨래를 걷어서 따뜻하게 다림질도 해주었다. 그렇게 방 안의 모든 사물을 위로하고 또 격려하고 나서야 남자는 비로소 잠자리에 드는 것이었다.

 여기까지 읽는 동안 이미 <러브레터>(1995)와 <중경삼림>(1994)이란 영화 제목을 재빨리, 그리고 정확히 기억해낸 사람은 나름 응답할 게 있는 1990년대를 보낸 것이다. 누구는 스키장에서 “오겡키데스카?”를 함께 외쳐대던 커플로, 누구는 원룸에서 젖은 걸레의 눈물을 홀로 쥐어짜던 싱글로. 누구는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책장을 넘기면서, 또 누구는 팝송 캘리포니아 드림인(california dreamin’)을 흥얼거리면서. 그 여자의 메아리를 잊지 못해 탄식하는 사람들 중 하나였거나, 아니면 그 남자의 넋두리가 잊혀지지 않아 피식 웃는 사람들 중 하나였거나. 서로 포즈와 표정은 달라도 결국 같은 카메라 앞에서 웃고 있는 단체사진 속 동창생처럼, 어쨌든 우리 모두는 <러브레터>와 <중경삼림>의 관객으로 1990년대를 함께 통과했던 것이다.

 이와이 슌지와 함께 관객은 ‘짝사랑’을 다시 시작했다. 왕가위와 더불어 오래도록 ‘옛사랑’을 잊지 못하였다. 이와이 슌지 영화의 주인공들은 사랑이 시작되었다는 걸 너무 늦게 알아챘고, 왕가위 영화의 주인공들은 사랑이 끝났다는 사실을 너무 늦게 받아들였다. 두 사람이 그려낸 사랑의 본질은 같았다. 그것은 끊임없이 어긋나고 엇갈리는 사랑. 말하자면, 시계 속 시침과 분침의 관계와도 같은 것이었다.

 숫자 ‘12’위에 포개져 잠시 하나가 된 시침과 분침. 하지만 시침을 그 자리에 남겨두고 분침 혼자 조금씩 멀어진다. ‘12’를 그리워하면서 ‘1’로, ‘2’로, ‘3’으로…. 그렇게 계속 앞으로 나아가지만 그것은 동시에 과거의 제자리로 돌아가는 일이기도 하다. 그게 바로 둥근 원을 그리며 도는 분침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김세윤 방송작가
김세윤 방송작가

 이와이 슌지와 왕가위가 만든 세계에선 누구나 시곗바늘이 된다. 결국엔 첫사랑으로. 결국엔 옛사랑으로. 한 사람의 일생이 다른 한 사람의 일생과 포개지는 아주 짧은 순간을 위해 참 먼 길을 돌아가는 것이 사랑의 숙명이라고 믿게 만든다. “그러므로 우리는 물결을 거스르는 배처럼, 쉴새없이 과거 속으로 밀려나면서도 끝내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위대한 개츠비>의 이 유명한 마지막 문장을 이와이 슌지와 왕가위는 이렇게 고쳐쓰고 있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원을 따라 도는 시곗바늘처럼, 쉴새없이 미래로 밀려나면서도 끝내 과거로 돌아가는 것이다.”

 20세기의 마지막 10년. 나도 영화도 세상도 지금보다는 조금 더 낭만적이었을 그때. 나는 ‘쉴새없이 미래로 밀려나면서도 끝내 과거로 돌아가는’ 사람들과 사랑에 빠졌다. 하나의 외로움이 가만히 또 하나의 그리움을 껴안는 영화 두 편에 마음을 빼앗겼다. 이와이 슌지와 왕가위의 관객으로 20대를 보냈다. 제법 순진했던 ‘그때의 나’를 지금도 기분 좋게 추억한다. 쓸데없이 진지했던 ‘나의 그때’가 예쁘고 그립다.

 <러브레터>와 <중경삼림>이 다시 개봉했다. 그 여자의 메아리와 그 남자의 넋두리에 다시 응답해 볼 생각이다. 그런다고 내 청춘의 유통기한이 1만년이 되진 못하겠지만, 비누처럼 야윈 내 감성이 조금 통통해지기는 할 테니까.

김세윤 방송작가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문화 많이 보는 기사

추위에 쫓겨 닿은 땅…한국인은 기후난민이었다 [책&생각] 1.

추위에 쫓겨 닿은 땅…한국인은 기후난민이었다 [책&생각]

해발 3500m 하늘 아래 첫 서점, 그 경이로움에 취하다 2.

해발 3500m 하늘 아래 첫 서점, 그 경이로움에 취하다

‘에미상’ 18개 부문 휩쓴 일본 배경 미드 ‘쇼군’ 3.

‘에미상’ 18개 부문 휩쓴 일본 배경 미드 ‘쇼군’

‘진취적’ 왕후를 비추는 ‘퇴행적’ 카메라…우씨왕후 4.

‘진취적’ 왕후를 비추는 ‘퇴행적’ 카메라…우씨왕후

흥행 파죽지세 ‘베테랑2’…엇갈리는 평가에 감독이 답했다 5.

흥행 파죽지세 ‘베테랑2’…엇갈리는 평가에 감독이 답했다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