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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영화·애니

계란이 살아 바위를 넘은 이야기

등록 2014-01-24 19:42수정 2015-10-23 18:52

영화 <또 하나의 약속>
영화 <또 하나의 약속>
[토요판] 김세윤의 재미핥기
최규석 우화집 <지금은 없는 이야기>(사계절·2011)를 또 꺼내 읽었다. “뭐든지 가위바위보로 결정하는 마을” 이야기를 다시 읽고 싶어서였다.

“뭐든지 가위바위보로 결정하는 마을이 있었습니다. 마을 대표를 뽑을 때는 물론이고, 집이나 음식을 나눌 때도, 힘들고 위험한 일을 할 때도 사람들은 가위바위보를 했습니다. 연달아서 이기거나 지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이 규칙에 불만을 가진 사람은 별로 없었습니다. 누구라도 영원히 지기만 하지는 않을 테니까요. 그런데 한 사람, 이 규칙 때문에 노심초사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얼마 전 마을의 위험한 일을 맡았다가 손을 다친 후로 주먹을 펼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처음 한동안은 주먹만 내는 것으로도 웬만큼 버틸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서서히 그가 주먹밖에 낼 수 없다는 사실을 눈치채기 시작했고, 그와의 대결에서는 모두가 보를 내었습니다. 순식간에 그는 마을의 힘들고 위험한 일을 도맡게 되었고, 그러면서도 가장 나쁜 집과 안 좋은 음식만 가질 수 있었습니다.”(<지금은 없는 이야기> 중 ‘가위바위보’)

아무래도 너무 불공평하다는 생각에 ‘(오른)손을 다친 남자’는 마을 대표에게 부탁한다. 왼손으로 가위바위보를 할 수 있게 해달라고. 마을 대표는 오른손으로만 가위바위보를 하는 게 마을의 규칙이라고 말한다. “규칙이란 언제 어디서나 지켜져야 하니까 규칙”이라며 남자의 주장을 일축한다. “하지만 이건 너무 억울합니다. 마을 일을 하다가 다친 건데….” 계속 항의하는 남자. 별안간 솔깃한 제안을 내놓는 마을 대표.

“규칙을 지키면서 규칙을 고치는 방법이 있지.”

“그… 그게 뭔가요?”

“이 규칙을 걸고 가위바위보를 하는 거지. 우리 모두를 이기면 자네 맘대로 규칙을 바꾸는 거야. 자, 가위~ 바위~”

이야기는 이렇게 끝이 난다. 최규석이 그린 마지막 컷에는 마을 대표 뒤에 서서 일제히 보를 내려고 기다리는 무리가 보인다. 단단하고 또 단단해서 감히 계란을 던져볼 엄두조차 나지 않는 바위 같은, 외로운 개인을 막아선 힘센 무리들. 영화 <또 하나의 약속>을 보는 내내 나의 머릿속에는 그 위압적인 한 컷의 이미지가 둥둥 떠다녔다. 집에 돌아와 <지금은 없는 이야기>를 다시 꺼내 읽은 이유다.

우화로만 남아야 할 이야기가 이 나라에서는 자주 실화가 된다. 그리고 실화는 아주 가끔 영화로 만들어진다. 진성반도체라고 썼지만 누구든 삼성반도체라고 읽게 될 대기업에 들어간 딸이 2년도 되지 않아 백혈병 발병. 발병 1년여 만에 병원에 다녀오던 딸이 아버지가 모는 택시 뒷좌석에서 사망. 돈 몇 푼으로 해결하려는 회사에 맞서 길고 힘든 법정 싸움에 돌입. 아버지(박철민)는 마지막 재판에서야 겨우 발언 기회를 얻는다.

“택시 운전하다 보믄요. 술 취해서 돈 안 내구 도망가는 손님들이 꼭 있어요. 그 손님 잡으믄 머이라구 하는지 아세요? 돈 냈다구, 아저씨가 사기 치는 거 아니냐고 잡아떼요. 그러믄서 자기가 돈 안 낸 증거를 내놓으래요. 공단이랑 회사두 똑같아요. 산재신청 하믄 우리보구 증거를 내놓으래요. 영업비밀이라구 자료두 내놓지 않구, 작업장에 들으가지두 못하게 하믄서 증거를 내놓으라는 법이 세상에 우데 있어요?”

아버지가 판사를 향해 목소리 높이는 그 법정에는, ‘일제히 보를 내려고 기다리는’ 이 나라의 힘센 무리들이 앉아 있다. ‘회사의 위험한 일을 맡았다가 손을 다친 후로 주먹을 펼 수가 없게 된’ 어느 여성 노동자의 억울한 가위바위보를 부인하며 앉아 있다. 그녀가 내민 주먹을 가볍게 집어삼킨 거대하고 우악스러운 보가, 이젠 그녀 아버지의 작은 주먹마저 에워싸려 하고 있다. 그것은 ‘영화의 한 장면’이면서 동시에 ‘실화의 모든 장면’이었으니. 2014년 1월 현재,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 ‘반올림’에 접수된 피해자는 151명. 그중 58명이 죽어 나가는 동안 회사가 낸 보는 매번 노동자의 주먹을 이겼다.

그러다 맨 처음 ‘주먹’이 이긴 싸움이 있다. <또 하나의 약속>은 삼성반도체 노동자 고 황유미씨의 아버지 황상기씨가 만들어낸 그 기적 같은 승리의 기록이다. 한번은 이겼지만 아직 완전히 이겼다고는 할 수 없는, 지금도 진행중인 참 눈물겨운 ‘가위바위보’에 대한 이야기다.
김세윤 방송작가
김세윤 방송작가
영화를 보는 동안 몇번이고 일어서서 “이라믄 안 되는 거잖아요”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영화를 보고 나서 이제라도 내 작은 주먹을 함께 내밀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적자생존은 정글의 법칙이니까. 문명의 법칙은 ‘약자공존’이 되어야 한다고 나는 믿으니까.

김세윤 방송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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