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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음악·공연·전시

“불의한 현실에 싸대기 올리면서 재밌는 그림 꿈꾸죠”

등록 2021-12-27 19:10수정 2021-12-28 02:01

【짬】 역사 주제 첫 개인전 노주일 작가

‘그림의 꿈’이라는 주제로 30일까지 첫 개인전을 연 노주일 작가.         정대하 기자
‘그림의 꿈’이라는 주제로 30일까지 첫 개인전을 연 노주일 작가. 정대하 기자
광주 오월미술관 계단을 오르다 벽에 걸린 ‘오월의 눈물꽃’을 만났다. 총을 든 시민군, 피와 밥을 나누던 광주 시민들의 모습이 둥근 달 속에 새겨져 있다. 펜으로 그린 뒤 수채 아크릴 작업을 한 그림이라 표정이 섬세하게 살아 있다. 최후 항전을 앞둔 시민군은 비장하지만 두려움보다 희망을 잃지 않고 있다. 주먹밥을 든 아주머니의 표정도 웃음을 머금고 있다. ‘그림의 꿈’이라는 주제로 30일까지 첫 개인전을 연 노주일(49) 작가는 지난 24일 “광주시민들이 흘린 눈물이 아름다운 눈물 꽃의 노래가 되어 멀리멀리 울려 퍼지는 것을 표현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림의 꿈> 전시 포스터.
<그림의 꿈> 전시 포스터.

노 작가는 2018년까지 5년 동안 광주민족미술협의회(광주 민미협) 사무국장을 지내며 몸으로 부대끼고 금남로와 5·18민주광장을 뛰어다녔다. ‘오월무지개’ 걸개그림전(2010), ‘춤추는 촛불 바닥전’(2017) 등 숱한 그림전을 기획하고 참여했지만 정작 자신의 개인전은 미뤄두고 있었다. 2014년 무렵 선배 이상호 작가 권유로 개인 작업을 생각하다가 0.05~1.12㎜ ‘펜’이 손끝에 ‘앵겼다’. “화방에 가서 펜을 끄적끄적해봤더니 펜이 손끝에 전달되는 감각이 좋더라고요. 그전에 유화하면서 긁어 파내는 작업을 하느라 힘들었거든요.” 이번에 전시한 12점 작품들은 모두 펜화다.

노 작가의 첫 개인전은 일제 청산과 독립, 5·18 등 역사 문제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녹슨 톱 메고 저승길 동무’라는 작품은 “만화적 요소와 세태 풍자”가 눈길을 끈다. 그림 속에서 죽음 꽃이 핀 전두환 멱살을 잡고 백선엽의 머리끄덩이를 잡은 이는 작가다. 저승 길 맨 앞에 박정희가 고개를 숙인 채 기다리고 있다. 노 작가는 “그림 속 백선엽 옆 묘비에 적힌 ‘시라카와 요시노리’는 윤봉길 의사가 처단한 관동군 총사령관 이름이자 백선엽이 창씨 개명해 선택한 이름이었다”고 말했다. ‘안중근 박정희를 쏘다’라는 작품은 “일본 이름이 다카키 마사오였던 박정희가 행한 독립 투쟁가들에 대한 악행의 단죄를 실행한 완성도 높은 회화작품”(범현이 오월미술관장)이다.

30일까지 광주 오월미술관에서
5·18 등 주제로 펜화 12점 선봬
‘박정희 친일’ 등 통렬한 풍자
“관객 유쾌·통쾌한 그림 그릴 터”

5년 동안 광주 민미협 사무국장
방황하다 뒤늦게 민중미술 입문

‘좌파본능1’이라는 작품엔 사연이 있었다. 지난해 초 별이 가장 잘 보인다는 담양 창평 하늘을 찾아갔던 노 작가는 미끄러지면서 인대와 오른손이 뒤틀리며 손목뼈를 다쳤다. 노 작가는 “어차피 이리된 거 왼손으로라도 그림들을 그려보자고 했더니 제법 되더라”고 말했다. 왼손잡이였지만 글씨를 배울 무렵 왼손을 사용하지 않도록 교육받았던 그에게 ‘좌파본능’이 남아 있었던 셈이다. ‘좌파본능1’은 미얀마 민주화운동을 상징하는 ‘세 손가락’을 그린 작품이다. 노 작가는 “5·18민주화유공자로 경북 안동에서 생활하는 차명숙씨가 이 그림을 새긴 마스크와 상의를 그 지역 분들에게 널리 보급하고 있다”고 말했다.

광주광역시 국립아시아문화전당 건너편 오월미술관에서 열리는 노주일 작가 전시회장.
광주광역시 국립아시아문화전당 건너편 오월미술관에서 열리는 노주일 작가 전시회장.
첫 개인전을 열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다. 1991년 전남대 미술대학 서양화과에 들어가 1999년 수료한 노 작가는 “고교 때 전교조가 창립됐던 시기여서 비밀 공부 모임도 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대학에 입학한 뒤엔 단조로운 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했다. 졸업 작품전을 내면서 표현형식과 방향을 정했지만, 그림에 대해 회의감도 느꼈다. 2000년 초반 전남 장성 삼서면 산골로 들어가 밭농사를 지으며 자신을 가두고 그림 공부를 하다가 미술학원 입시 강사로 다시 사회로 나왔다. 노 작가는 “물감값 벌려고 벽화·초상화도 그리고 현장 ‘노가다’판에서 페인트칠도 했다”고 말했다. 그때 만난 조정태 화가와 광주 예술의 거리 영흥식당에서 막걸리를 마시며 ‘민중미술’에 뒤늦게 입문했다.

선배 이상호 작가와의 만남도 그에겐 의미가 크다. 광주비엔날레 초대 작가인 이상호(61) 화가는 1987년 8월 조선대 미대 회화과 4학년 때 후배 전정호 작가와 걸개그림을 그렸다가 미술인으로선 처음으로 국가보안법으로 구속된 바 있다. 그는 이 작가가 옛 서대문형무소에 갇혔을 때 감옥 안 마룻바닥에서 누군가 새긴 ‘대한독립만세’라는 글씨를 발견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감옥에서의 꿈’이라는 노 작가의 작품에 나오는 이상호 작가는 감옥 벽에 ‘국가보안법 철폐’라는 글을 새기고 있다.

노주일 작가가 지난 24일 '감옥에서의 꿈'이라는 작품을 그리게 된 배경을 이야기하고 있다.
노주일 작가가 지난 24일 '감옥에서의 꿈'이라는 작품을 그리게 된 배경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는 역사문제에 관심을 둔 작품을 그리지만, 표현 방식은 색다르다. 노 작가는 “그림을 본 관람객들이 기분이 나쁘지 않고 유쾌하고 통쾌하게 느낄 수 있는 작품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언론인 한송주의 평가대로 그는 “불의한 현실에 가차 없이 싸대기 올리기”를 주저하지 않으면서도, 범현이 오월미술관장의 지적처럼 “역사에 무관심한 젊은이들도 재미있다고 느낄만한 거리를 던져주는 작업”을 시도한다. 노 작가는 “어르신 한 분이 두시간 동안 그림을 보고 가시더니 사흘 후에 오셔서 봉투 건네면서 ‘우리의 자존심을 지켜줘서 고맙소’라고 하시더라”며 “그림으로 우리 대중, 서민들의 꾸는 친일청산과 진정한 독립, 5·18 해방의 꿈을 이뤄주고 싶다”고 강조했다.

정대하 기자 daeh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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