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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경제일반

곳간 사정 불확실한데…증세는 없이 수백조 ‘묻지마 공약’

등록 2022-02-18 05:00수정 2022-02-18 10:05

이재명 300조, 윤석열 266조
역대급 공약 이행 비용 제시
세부 내역·재원 조달 안 보여
“지난해 세수 증가는 일시적
지출 구조조정만으론 불가능”

“지난해 세금이 1년 전에 견줘 20%나 늘어난 건 비정상적인 일이에요. 당장 올해부터 세수가 줄면 어떻게 해야 할지 걱정이 큽니다.”

지난 16일 <한겨레>와 만난 경제 부처 핵심 관료는 이런 고충을 털어놨다. 그는 박근혜 정부 당시의 경험을 떠올렸다. ‘증세 없는 복지’를 내걸고 집권한 박근혜 정부는 3년 연속 초유의 ‘세수 펑크’(정부 계획보다 세금이 덜 걷히는 것) 사태를 겪었다. 감세 정책을 편 이명박 정부로부터 넉넉지 못한 곳간을 물려받았기 때문이다. 경기 둔화 때 제 역할을 해야 하는 정부 재정 정책의 발이 꽁꽁 묶이며 관료들도 발만 동동 굴렀다는 게 그의 회상이다.

올해 출범하는 새 정부 사정은 어떨까? 분명한 건 하나다. 주요 대선 후보들이 수백조원 드는 공약을 증세 없이 추진하겠다며 나선 것은 과거와 똑같다는 점이다.

한국매니페스토실천본부가 주요 후보들에게 받은 답변 자료를 보면,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와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의 대선 공약 이행 비용은 각각 300조원 이상, 266조원이다. 심상정 정의당 후보는 175조원, 안철수 국민의당 후보는 201조원이라고 추산했다.

※ 이미지를 누르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이는 과거 대선보다 많게는 100조원 넘게 불어난 규모다. 문재인 대통령과 박근혜 전 대통령이 후보 시절 제시한 공약 이행 금액은 각각 178조원, 135조원이었다. 코로나19 손실 보상 외에 올해 대선 공약에 수십조원 드는 대형 공약이 대거 포함돼서다. 이재명 후보의 기본소득, 윤석열 후보의 기초연금 및 병사 월급 인상 공약 등이 대표적이다.

정부 지출 규모에 견준 재정 부담도 커졌다. 올해 정부 예산(본예산 기준 608조원)에서 공약 이행액이 차지하는 비중은 이재명 후보 49% 이상, 윤석열 후보 44%로 박근혜 정부 출범 당시(39%)보다 대폭 확대됐다.

문제는 돈이 더 필요할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다. 정부 재정 사정에 밝은 한 관료는 “현 정부도 실제론 공약 이행에 178조원보다 훨씬 많은 돈을 썼다”며 “현재 각 진영이 제시한 금액도 숫자를 적당히 끼워 맞춘 것일 수 있다”고 귀띔했다. 비용 추산을 주먹구구로 했을 여지가 있다는 얘기다.

이재명 후보의 경우 개별 공약 이행에 얼마가 필요한지 아예 명확하게 밝히지 않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과 박근혜 전 대통령이 후보 시절 공약별 이행액을 하나하나 계산한 것과 대조적이다.

이광재 매니페스토본부 사무총장은 17일 <한겨레>와 한 통화에서 “이번 대선의 특징은 각 후보들이 밝힌 공약 이행 비용에 포함되지 않은 조 단위 지역 공약들이 많다는 점”이라며 “디지털 전환 시대에 아파트·도로·철도 등 지역 인프라 개발에 돈을 쏟아붓는 게 맞는지 의문”이라고 꼬집었다.

공약 재원 마련 방안이 부실하다는 지적도 많다. 이재명, 윤석열 후보 모두 증세라는 정공법이 아니라 정부가 허리띠를 졸라매거나 경제 성장에 따라 자연히 더 걷히는 세금으로 재원을 조달한다는 방침이다.

윤 후보 쪽은 전체 공약 이행 비용 266조원의 절반이 넘는 150조원을 기존 정부 지출 구조조정으로 마련하겠다고 했다. 나머지 116조원도 별도의 증세 없이 매년 4.6%씩 더 걷히리라 예상되는 세금으로 충당하기로 했다. 재정학에 정통한 한 경제학과 교수는 “기존에 수혜자가 있는 정부 예산의 경우 1조원도 삭감하기가 매우 어렵다”면서 “지출 구조조정으로 공약 재원을 마련한다는 건 불가능한 얘기”라고 했다.

홍순탁 내가만드는복지국가 운영위원장(회계사)은 “지난해 세금이 많이 걷힌 건 부동산 양도소득세와 더불어, 양도세 과세를 피하려고 증여를 많이 한 까닭에 증여세 세수가 크게 늘었기 때문”이라며 “이런 세수 증가는 일시적인 데다 보유 주택을 팔지 않고 물려줬다는 건 미래의 양도세 세수를 미리 당겨받은 거로 볼 수도 있다”고 분석했다.

실제로 정부가 예상한 올해 국세 수입은 약 343조원으로 지난해 걷힌 세금(344조원)과 거의 같은 수준이다. 코로나로 인한 경제의 불확실성이 여전한 데다 자산 거품 해소, 경기 둔화 우려 등이 현실화하면 세수도 계속 호조세를 보이리라 장담할 수 없다.

증세 없이 ‘재정의 적극적인 역할’을 강조하는 각 후보들의 정책 기조가 물가 상승을 부추길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감세와 정부 지출 확대라는 패키지 공약이 코로나 위기 국면에서 시중에 풀렸던 돈을 다시 줄여야 하는 과제를 가진 정부의 현 상황에 역행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이재명 후보자 직속 전환적공정성장전략위원회 위원장을 맡은 하준경 한양대 교수(경제학)는 “최근의 물가 상승은 국내 정책과 상관없이 해외 에너지 가격 상승 등으로 인한 것이어서 인플레이션을 크게 걱정할 상황인지는 모르겠다”며 “공급망 병목 현상을 해결하고 정부 투자를 통해 공급 능력을 확대하면 물가 상승을 유발하지 않으면서 성장할 수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윤석열 후보 선거대책위원회 경제정책본부장인 김소영 서울대 교수(경제학)는 “재정을 많이 쓰면 당연히 인플레이션에 영향을 주겠지만 그런 점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고 중장기적으로 재정 건전성을 굉장히 중시하고 있는 만큼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박종오 기자 pjo2@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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