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물가로 ‘물가상승→임금인상→물가재상승’으로 이어지는 소용돌이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다. 한국도 올 들어 임금이 조금씩 오르는 모습이지만, 주로 대기업 및 상용직 등 상대적으로 안정된 일자리의 임금만 들썩이는 분위기다. 상위계층의 임금이 오르는 가운데 기업들이 늘어난 인건비를 소비자가격에 전가하면 취약계층의 고물가 고통은 훨씬 심해질 수밖에 없다.
14일 고용노동부 사업체노동력조사를 보면, 올해 1~4월 근로자 1인당 평균 임금총액의 전년 대비 증가율은 6.1%로 1년 전(4.1%)보다 높았다. 이 기간 대기업 및 중견기업(종사자 300인 이상)의 임금 증가율은 10.4%였으나, 중소기업(종사자 1∼299인)의 증가율은 4.6%에 그쳤다. 임금 인상이 대부분 큰 기업과 상용직 위주로 이뤄진 것이다.
산업별로 보면, 제조업(8.7%), 금융 및 보험업(8.0%), 전문 및 과학·기술 서비스업(7.6%) 등의 임금 증가율이 상대적으로 높았다. 서비스업인 숙박 및 음식점업 임금 증가율(4.1%)을 크게 웃도는 수치다. 숙박·음식점업은 저임금·비정규직이 다수인 일자리다. 종사자 지위별로는 상용직 임금이 6.5% 오르는 동안 임시일용직 임금은 3.1% 인상되는 데 그쳤다.
최근 임금이 오른 배경에는 연초 성과급 지급 등 특별급여의 영향이 존재한다. 한국은행의 지난 4월 ‘이슈노트’를 보면, 기본급 및 수당 등 지속성이 높은 정액급여도 지난해 말부터 들썩이고 있다. 고물가에 따른 임금 인상 요구가 일정 부분 반영되고 있다는 뜻이다.
고물가 시대에 상위계층의 임금만 오른다면 임금발 인플레이션 고통이 심화하게 된다. 기업들은 늘어난 고용 비용을 감당하기 위해 가격 인상에 나서게 되고, 물가는 추가로 치솟는다. 상위계층은 임금이라도 늘었으나 소득이 제자리걸음인 하위계층은 더욱 심해진 고물가 고통을 고스란히 떠안아야 한다. 추경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최근 “상위 기업이 높은 임금 상승을 주도하고 있다. 과도한 임금 인상은 고물가 상황을 심화시키고, 임금 격차를 확대시킬 수 있다”고 말했다.
한국의 임금 상황은 다른 나라와는 다르다. 물가상승률이 9%대까지 치솟은 미국은 한국과 반대로 저임금 일자리부터 임금 인상이 시작돼 다른 업종으로 퍼지고 있다. <한겨레>가 미국 노동통계국의 업종별 평균 임금을 분석해 본 결과, 대표적인 저임금 일자리인 레저·접객 업종의 시급은 올해 1월 기준 전년 대비 13% 증가했다. 중임금 일자리인 교육·의료 업종(6.8%), 고임금 일자리인 전문가 비즈니스 업종(6.9%) 임금 증가율의 약 2배다.
이는 한국과 미국의 노동시장 차이에서 비롯된 것으로 추정된다. 미국은 올해 5월 기준 구인 1명당 구직을 원하는 실업자 수는 0.5명에 그쳤다. 뒤집어 말하면 구인 건수가 구직의 2배인 셈이다. 고물가와 구인난을 함께 겪으며 노동자 우위 현상이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반면 한국은 올해 5월 구인배수(신규 구인인원/신규 구직건수)가 0.75로 구인보다 구직 수요가 더 많았다.
대기업 및 상용직의 과도한 임금 인상으로 물가가 재상승하는 악순환을 막는 것이 한국 정책당국의 주요한 과제다. 임금 인상 요구에 영향을 끼치는 일반인 기대인플레이션(향후 1년에 대한 물가 인식)이 너무 오르지 않도록 관리하는 것이 중앙은행의 숙제라면, 정부는 고물가에 취약한 하위계층에 대해 적정 수준의 임금 인상과 소득 보전 방안을 강구할 필요가 있다. 지난 5월 한은 금융통화위원회 회의에서 한 금통위원은 “과도한 임금 인상은 기업의 비용 압박 요인으로 작용해 인플레이션 악순환을 초래하지만, 어느 정도의 임금 증가는 가계의 실질소득 하락 압력을 완화할 수 있다”며 “적정 수준의 임금 증가 폭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전슬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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