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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경제일반

부채 위기 ‘금융억압’이 답인가

등록 2012-04-29 22:28

[진단&전망] 부채와 자산 그리고 환율
‘과다부채 부담 축소’ 명목…자산가격 끌어올려
결국 수요기반 붕괴…한국에도 잇단 ‘위험경고’
재정 압박→금융 억압→국제 환율전쟁 ‘악순환’

이른바 ‘부채의 경제학’에 대한 관심이 뜨겁다. 국내에서도 1000조원에 육박한 가계부채 문제를 둘러싸고 우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고, 비교적 안전하다고 평가받는 우리나라 재정 여건에 대해서도 인구 고령화나 잠재부채 등을 이유로 중장기적인 위험성에 대한 경고가 줄을 잇고 있다. 한국을 포함하여 대선이나 총선 등 주요 정치일정을 앞두고 세계 각국에서는 지금 “문제는 부채야, 멍청아!”라는 냉소가 확산되고 있다.

불황의 경제학자 폴 크루그먼은 세계경제를 뒤흔들고 있는 지금의 부채위기를 “뒤죽박죽의 세상”이라고 부른 바 있다. “거시경제의 일상적인 규칙 중 상당수가 뒤집혀진 세상”이라는 뜻이다. 일본의 장기불황을 부채위기에 따른 ‘대차대조표 불황’으로 진단했던 리처드 쿠는 이를 행태유인의 변화로 설명한다. 주류경제학의 인간 행태에 대한 기본 가정인 이윤 극대화나 효용 극대화 대신에, 부채위기에서는 ‘부채 최소화’가 전반적인 경제논리를 주도한다는 것이다. 케인스가 말한 ‘유동성 함정’의 현대적 버전이다.

이처럼 부채 최소화가 최근 유행하는 ‘부채 디레버리징’(부채 축소)의 실체다. 그러다 보니 정상적인 경제운용, 다시 말해 물가관리나 고용안정 등의 책무는 뒷전으로 내몰리기 일쑤다. 오히려 부채의 이면에 자리잡은 자산가격이 중요한 변수로 부각된다. 가계나 은행, 심지어 정부조차 빚의 원천인 자산가격(부동산, 금융상품, 국채금리 등)에 초점을 맞추는 탓이다. 부채 디레버리징의 다른 한쪽에서 이른바 양적완화 등을 통해 ‘자산 리플레이션’(자산가격 부양)에 정책 에너지가 집중되는 것도 이런 연유다.

부채위기에서 비롯된 긴축, 즉 허리띠 졸라매기의 부담을 자산가격 상승으로 지탱하겠다는 건데, 그 외에도 중장기적 안목에서의 체질 개선, 특히 유연성 제고를 위한 개혁의 필요성이 가세한다. 하지만 이런 노력의 저변에는 몇 가지 문제점이 자리잡고 있다.

쿠가 지적한 대차대조표 불황은 기본적으로 부채위기가 일종의 트라우마(상흔)를 수반한다는 데 주목한다. 부채위기가 본격화되면 수요 기반이 붕괴되면서 장기불황에 빠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럴 때에는 긴축 혹은 개혁이 능사일 수 없다. 그 유명한 ‘절약의 역설’(과도한 저축에 따른 수요의 위축)은 물론이고 ‘노고의 역설’, 즉 구조개혁을 통한 잠재 국내총생산(GDP)의 증대 노력이 실제 국내총생산의 감소를 초래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경제의 총수요 붕괴에 대응해 별도의 수요 원천을 찾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여전히 크다. 전쟁이 대표적인 출로겠지만, 케인스가 강조하는 대로 ‘최종 투자자’로서 정부의 능동적인 역할이 주목을 끈다. 또한 자산 리플레이션 역시 자산 보유자와 비보유자 사이의 불평등이라는 문제를 낳는다. 이런 맥락에서 민주주의 사회의 공통 이해를 담당한 정부의 재량적 개입에 초점이 맞춰진다. 나아가 자산 리플레이션을 위해 방출되었지만, 실물 경제에 제대로 소화되지 못한 잉여 유동성이 글로벌 자본유출입의 변동성을 심화시키는 것은 물론 나아가 인플레이션으로 비화될 위험마저 좌시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유럽위기에서 쟁점화되었다시피, 세계 금융시장에서는 이미 각국의 재정건전성을 실시간으로 압박하고 있다. 재정 여건의 차이에 따라서 취약국의 재정위기 가능성이 커진 것이다. 그래서 다시 중앙은행에 공이 돌아간다. 재정의 취약성을 억제할 수 있는 방편으로서 저금리 필요성이 부각된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금융시스템 구제라는 명목에 따른 것이지만, 이른바 거시건전성에 대한 강조는 역설적으로 재정 부담을 소화해줄 국채의 수요 기반으로서 국내 ‘전속 투자자들’의 유지와 관리를 목적으로 한다.

<이번엔 다르다>는 저서의 공저자로 유명세를 탄 라인하트는 정부의 재정관리를 목적으로 한 이런 행태를 ‘금융억압’의 부활로 진단한다. 전통적인 경제관리가 붕괴되고 재정의 활용과 관리에 초점이 맞추어진 ‘재정의 지배’ 시대에 마이너스 실질금리를 유지하기 위한 전략 말이다. 실제로 라인하트는 미국과 영국의 경우 전후 금융억압 시기에 정부의 부채청산(이자 경감) 규모가 연평균 국내총생산의 3%를 넘는다고 추정한다. 여기다 인플레이션까지 결합되면 금상첨화다. 물가가 높았던 오스트레일리아와 이탈리아의 경우 부채청산 규모가 연평균 국내총생산의 5%를 넘는 것으로 추정되었다.

본래 금융억압은 신흥시장의 낙후된 금융시스템이나 자본통제 등을 문제시하는 개념이다. 하지만 케인스에게서 영감을 얻은 논자들은 금융과잉의 폐해를 시정하는 한편 효과적인 재정관리 수단으로서 금융억압에 주목한다. 문제는 금융억압이 유효할 수 있는 조건이다. 재정의 근저에 놓인 각국의 통화에 대해 더는 안정성이나 신뢰를 담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오늘날의 금융억압은 오히려 양적완화니 자본통제니 하면서 환율전쟁의 가능성만 배양하고 있는지 모른다. 아마도 부채위기의 또다른 종착역은 환율위기 아닐까?

장보형/하나금융경영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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