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초 부평 수출산업단지에 있는 일본계 의류업체에서 편직공으로 일했던 유해우씨가 자신이 일했던 공장을 뒤로한 채 서 있다. 류이근 기자
1973년 수출산업공단서 파업 벌이다 해고 당한 유해우씨
“하루 13~16시간씩 장시간 노동
연장근로 수당도 제대로 안줘
방값 쌀값 빼면 못버틸 임금수준
정부, 외자유치 위해 노조 불허”
“하루 13~16시간씩 장시간 노동
연장근로 수당도 제대로 안줘
방값 쌀값 빼면 못버틸 임금수준
정부, 외자유치 위해 노조 불허”
인천시 부평구 청천동에 위치한 한국수출국가산업단지(옛 한국수출산업공단)는 조성된 지 반세기가 지난 지금 옛날 흔적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1960년대 중반 수출 진흥을 위해 조성된 공단엔 지금 약 2만5000명이 1300개 업체(주안단지 포함)에서 일하고 있다. 인천지하철 1호선 갈산역에서 내리면 바로 공단으로 이어진다. 울타리도 없어 어디서부터 공단인지조차 구분이 가지 않는다.
일렉트로닉, 하이테크, 전자, 통신시스템 등이 나붙은 기업 간판은 이곳에 첨단 기업들이 몰려 있다는 것을 알리고 있었다. 공단이 디지털단지화됐다는 말이 괜히 나오는 게 아닌 것처럼 보였다. 업체 대부분이 전기전자나 기계 업종인 이곳도 40~50년 전에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세상이 변하면서 공단도 변했다. 지금은 섬유와 의류가 전체 고용인력의 5% 남짓에 불과하지만, 옛날엔 이곳의 중심 산업이었다. 섬유와 의류는 당시 우리나라의 최대 수출품목이기도 했다. 공단 안에는 싼 인건비를 보고 들어온 외국계 기업들이 많았다.
그곳에서 유해우(65)씨도 일했다. 어느덧 백발이 성성한 그이지만, 옛 기억을 떠올리는 게 선뜻 내키지 않은 눈치였다. “아주 비인간적이었지, 한두 마디로 다 얘기할 수도 없고….” 1970년대 초반 유씨는 스웨터를 짜는 편직공이었다. 그는 원사를 갖고서 ‘요꼬기’(횡편기)라고 불리던 편직기로 실을 짰다. 공장은 100% 일본계 투자 기업인 삼원섬유 소유였다. 공장에 노동자가 많을 때는 450명가량이었다. 그중엔 나이를 속이고 들어온 열대여섯살 소녀들도 섞여 있었다.
공장 노동자들에게 장시간 노동은 기본이었다. 하루 13~16시간 일할 때가 태반이었다. 24시간 철야 작업도 수시로 이뤄졌다. 유씨는 “선적 날짜를 맞추기 위해서 자주 그랬다”고 말했다. 스웨터는 공단에서 7.5㎞ 떨어진 인천항을 통해 일본, 미국, 유럽 등지로 수출됐다.
“회사, 최저임금 오르자 잔업 줄여
당시 우리들은 산업 노예였다
방글라데시 노동환경 뉴스에
한때 같은 노동자로서 안타까워” 살인적인 장시간 노동도 문제였지만, 노동의 대가도 제대로 지급되지 않았다. 연장근로를 해도 통상임금에 더 얹어 줘야 하는 수당이 나오지 않았다. 유씨는 “4시간 연장 근로를 하면, 시간외수당을 얹어서 주는 게 아니라 4시간만큼의 기본급만 더 쳐서 줬다”고 말했다. 휴일에 일해도 이런 식이었다. 명백한 근로기준법 위반이었지만, 문제된 적은 없었다. 노동자가 6일 일하면 1일 쉬어야 했지만, 회사는 한달에 쉬는 날을 2번으로 줄였다. “그조차도 바쁘다는 핑계로 못 쉬는 날이 많았다. 추석과 설 연휴를 빼곤 거의 연중무휴였다. 그때 결근하면 바로 잘렸다.” 유씨를 비롯한 노동자들의 불만은 컸지만, 감히 입 밖에 내지 못했다. 노동자의 생사여탈권을 쥔 계장, 주임, 반장 등 중간 관리자들의 횡포는 대단했다. 이들의 눈 밖에 나면 바로 해고였다. 외화벌이를 하기 위해 세운 수출산업공단에 있는 외국계 기업에서 노동자들이 뭉치기란 공단 밖 국내기업보다 더 어려웠다. 군부 독재 시기의 엄혹한 환경에 더해, 정부는 외국기업 유치를 위해 수출산업공단 안에서 노조를 허용하지 않았다. 노조는 헌법적 권리였지만, ‘외국인 투자기업의 노동조합 및 노동쟁의 조정에 관한 임시 특례법’을 만들어 사실상 수출산업공단에서 노조를 설립할 수 없도록 통제했다.
장시간 노동과 수당 미지급, 법정 휴일 미적용, 여성 노동자들에 대한 폭언과 폭행 등이 계속되자, 노동자들은 1973년 12월 파업을 벌였다. 유씨가 우여곡절 끝에 섬유노조 경기지부 삼원섬유분회를 결성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는 수출산업공단에 있는 첫 외국인 투자기업 노조였다. 그 과정에서 중앙정보부와 보안사, 부평경찰서 정보과 형사가 끊임없이 유씨를 회유하고 협박했다. 이들은 “그러다 다치면 당신만 손해야”라고 유씨를 겁줬다. 회사는 끝내 그를 해고했고, 경찰은 기다렸다는 듯이 그를 구속했다. ‘요주의 인물’로 찍힌 그는 이후 어느 기업에서도 환영받지 못했다.
유씨는 당시 노동자들을 “산업 노예”로 표현했다. 그는 하루 600~700원, 한달에 1만5000원에서 많게는 2만원가량을 벌었다. 여성 노동자들의 벌이는 이보다 적었다. 많아야 하루 500원이었고, 대개 300~400원을 받았다. 유씨는 “안 먹고, 안 쓰는 것 이외엔 방법이 없었다”고 말했다. 그도 외지에서 온 다른 노동자들처럼 공단 옆 초가집에 세들어 살았다. 연탄아궁이만 있는 부엌 딸린 작은 방의 월세는 4000원 정도였다. 화장실은 공용이었다. 경북 영주에 사는 부모님은 땅 한 뙈기 없었다. 그가 단돈 몇푼이라도 보내지 않으면 끼니를 굶어야 할 형편이었다. “방값과 쌀값 등을 빼면, 버티기 힘든 수준의 임금이었다. 남자들보다 임금이 낮은 여성들은 야식으로 끼니를 때우면서 쌀을 아꼈다. 그 때문에라도 여성들은 철야·잔업·연장 근로를 안 할 수 없었다.”
입에 겨우 풀칠하는 수준의 낮은 임금은 노동자들이 장시간 노동을 원하는 상황을 만들었다. 그는 “임금을 적게 주니, 잔업을 안 할 수 없게 되는 구조였다”고 말했다. 지난 1월 방글라데시 치타공에 있는 영원무역 공장에서 언니(파빈 악터)를 잃은 나시마 악터가 잔업을 그렇게 원했던 것도, 같은 이유였다. 최저임금이 오르자 회사는 잔업을 줄였고, 나시마의 월급은 이전과 다를 바 없는 낮은 수준이었다.
1960~70년대 한국은, 지금의 방글라데시다. 세계 최저 수준의 임금과 열악한 노동환경에서 일했던 한국인 노동자들이 부평 한국수출국가산업단지에서 사라졌지만, 이제 방글라데시 다카와 치타공 노동자들이 그 자리를 메우고 있다. 외국기업의 의류 노동자였던 한국인들의 후예는 이제 세계 2위 의류 수출국인 방글라데시의 최대 외국인 투자자로 변신했다. 과거 일본인이 한국에서 그랬던 것처럼, 이제 한국인들이 방글라데시에서 낮은 임금과 열악한 노동환경 아래 만들어진 옷을 전세계로 수출해 돈을 벌고 있다.
유씨는 방글라데시 등지에 진출한 한국 기업들에서 현지 노동자들이 숨지거나 그들이 처한 열악한 노동환경을 전하는 뉴스를 들을 때마다 마음이 착잡하다. “나도 한때 같은 노동자로서 안타깝기도 하고, 뭔가 한심하기도 하고, 때론 분노가 일기도 한다.”
치타공 인천/류이근 기자 ryuyigeun@hani.co.kr
당시 우리들은 산업 노예였다
방글라데시 노동환경 뉴스에
한때 같은 노동자로서 안타까워” 살인적인 장시간 노동도 문제였지만, 노동의 대가도 제대로 지급되지 않았다. 연장근로를 해도 통상임금에 더 얹어 줘야 하는 수당이 나오지 않았다. 유씨는 “4시간 연장 근로를 하면, 시간외수당을 얹어서 주는 게 아니라 4시간만큼의 기본급만 더 쳐서 줬다”고 말했다. 휴일에 일해도 이런 식이었다. 명백한 근로기준법 위반이었지만, 문제된 적은 없었다. 노동자가 6일 일하면 1일 쉬어야 했지만, 회사는 한달에 쉬는 날을 2번으로 줄였다. “그조차도 바쁘다는 핑계로 못 쉬는 날이 많았다. 추석과 설 연휴를 빼곤 거의 연중무휴였다. 그때 결근하면 바로 잘렸다.” 유씨를 비롯한 노동자들의 불만은 컸지만, 감히 입 밖에 내지 못했다. 노동자의 생사여탈권을 쥔 계장, 주임, 반장 등 중간 관리자들의 횡포는 대단했다. 이들의 눈 밖에 나면 바로 해고였다. 외화벌이를 하기 위해 세운 수출산업공단에 있는 외국계 기업에서 노동자들이 뭉치기란 공단 밖 국내기업보다 더 어려웠다. 군부 독재 시기의 엄혹한 환경에 더해, 정부는 외국기업 유치를 위해 수출산업공단 안에서 노조를 허용하지 않았다. 노조는 헌법적 권리였지만, ‘외국인 투자기업의 노동조합 및 노동쟁의 조정에 관한 임시 특례법’을 만들어 사실상 수출산업공단에서 노조를 설립할 수 없도록 통제했다.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