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화 대비 엔화값이 8년 만에 최저 수준으로 하락한 가운데 19일 원-엔 환율이 장중 900원 선 아래로 떨어졌다. ‘엔화 약세(엔저) 현상’의 주된 동력은 나홀로 돈풀기를 고수 중인 일본 통화정책이다. 앞으로 원-엔 환율 향배는 일본 통화정책 전환과 원화 강세 여부에 달렸다는 분석이 나온다.
원-엔 재정환율은 이날 오후 3시30분 기준(하나은행 고시) 100엔당 905.21원이다. 원과 엔을 동시에 거래하는 외환시장은 존재하지 않는 터라 두 환율의 상대가격은 원-달러 환율과 엔-달러 환율을 토대로 재계산해서 산출한다. 원-엔 환율은 이날 오전 한때 100엔당 897.49원까지 하락했다. 원-엔 환율 900원 선이 붕괴된 것은 2015년 6월25일(897.91원, 오후 3시30분 기준) 이후 약 8년 만이다.
원화 대비 엔화의 약세 원인은 일본 통화정책에서 찾을 수 있다. 일본 중앙은행(BOJ)은 지난 16일 완화적 통화정책을 유지하기로 결정했다. 인플레이션을 촉진해 소비자물가 상승률(신선식품 제외)이 안정적으로 2%가 될 때까지 돈을 계속 풀겠다는 것이다. 단기금리(-0.1%)를 동결하고 장기금리 지표인 10년물 국채 금리를 0% 정도로 유도하는 수익률곡선관리(YCC) 정책도 이어가기로 했다. 각국 중앙은행이 고물가를 끌어내리기 위해 정책금리를 인상하고 있는 것과 대조적인 풍경이다.
이런 결정은 엔화 가치 약세 심화로 나타났다. 원-엔 환율은 지난 4월27일 100엔당 1000.26원을 찍은 뒤 이달 16일(903.82원)까지 9.6% 급락했다. 엔화 가치가 그만큼 크게 추락했다는 뜻이다. 같은 기간 달러 대비 엔화 가치도 5.2% 떨어졌다.
반면 최근 들어 원화는 강세를 보여 원-엔 환율 하락에 또 다른 주요 원인이 되고 있다. 달러 대비 엔화 가치가 4월27일~6월16일 5.2% 하락하는 동안 달러 대비 원화 가치는 되레 5.2% 상승했다. 반도체 경기 회복 기대감으로 외국인 투자 자금이 물밀듯이 국내로 들어온 데 따른 것이다.
역대급 엔화 약세는 국내 투자자들의 투자 흐름에 영향을 주고 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엔화 예금에 돈을 넣고 일본 주식 투자에 뛰어드는 건 ‘환차익’을 염두에 둔 선택이다. 반면 엔 약세는 일본과 경쟁하는 국내 수출기업에는 달가운 소식이 아니다. 엔 약세는 국내 기업 수출품의 상대적 가격 경쟁력 훼손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다만 과거보다는 일본과의 수출 경합도가 낮아진 터라 엔 약세에 따른 부작용은 상대적으로 줄어든 것으로 파악된다. 우에다 가즈오 일본 중앙은행 총재는 지난 16일 금융정책결정회의 뒤 한 기자회견에서 “엔화 약세 효과는 플러스와 마이너스가 공존한다”면서도 전체적으로 엔저는 일본 경제에 긍정적 요인으로 작용한다고 평가했다.
앞으로 엔화 가치 향방은 일본 통화정책과 원화 가치 변화가 변수가 될 것으로 전망된다. 하반기에 일본 중앙은행의 나홀로 돈풀기 강도가 약해질 경우 엔화는 다시 강세로 돌아설 수 있다. 원화 강세의 지속 여부도 중요하다. 이날 원-엔 환율이 100엔당 900원대로 다시 올라선 배경에는 원화 강세가 다소 주춤했던 영향이 있었다. 원-달러 환율은 이날 하루 새 10.1원 급등했다.
김승혁 엔에이치(NH)선물 연구원은 “올해 연말께 일본 중앙은행의 통화정책이 바뀔 가능성이 있고, 원화 가치는 한동안 현 수준을 유지할 것으로 보여 원-엔 환율은 하반기엔 반등 압력을 받을 것으로 전망된다”고 말했다.
전슬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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