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좋은 일자리 프로젝트 4부 고용안정성-증권사편
외환위기 이후 한국의 일터를 짓누르는 대표적 스트레스 요인은 ‘고용불안’이다. 90년대 말 탄탄한 대기업에 다니던 직장인들조차 한순간 실직자로 내몰린 현실을 목도한 뒤, 청년들은 공무원 등 ‘정년 보장’ 직종에 몰리기 시작했다. 20년 가까이 지난 지금까지 그 흐름은 계속되고 있다.
구조조정은 경영자 입장에서는 ‘기업의 불합리한 구조를 개편해 효율성을 높이는 일’이지만 직장인들에겐 ‘인력 감축’을 의미하는 경우가 많다. 인력 감축의 형식은 대개 ‘희망퇴직’이나 ‘명예퇴직’이다. 구조조정의 주체일 수 없는 노동자들은 퇴직을 하면서도 ‘희망’이나 ‘명예’라는 단어를 짊어져야 한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2014년 고용 전망 보고서를 통해 ‘일자리 질’ 평가 지표인 ‘노동시장 안정성’을 ‘실업 위험’과 ‘실업 보험’의 두 축으로 정의했다. ‘실업 위험’은 실업자가 될 가능성과 실업 상태 지속 기간의 문제이고, ‘실업 보험’은 세금, 보조금 등 시스템이 얼마나 실업 위험을 분담해줄 수 있는가의 문제다.
한국처럼 실직에 대비한 사회안전망이 부족하고 재취업 가능성이 낮을 경우 사업장 단위의 실업 불안은 ‘일자리 질’, 나아가 ‘삶의 질’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좋은 일자리 프로젝트’는 4부 고용안정성 편에서 국가의 실업 보험 시스템은 논외로 하고 사업장 단위의 ‘실업 불안’에 우선 초점을 맞췄다.
금융업종은 최근까지 잦은 구조조정으로 ‘고용불안’에 시달리는 대표 업종이다. 배규식 한국노동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지난해 은행업종에서 희망퇴직, 명예퇴직으로 구조조정이 된 직원 수는 4200명에 달한다”며 “2015년 4월 기준 금융·보험업 취업자 수가 1년 전에 비해 6만9천명이나 줄었을 정도로 금융업계 구조조정이 심각하다”고 분석했다.
구조조정의 압박 속에 살아남기 위한 경쟁이 치열해질수록 직장 내 관계는 악화된다. 지난해 11월 전국사무금융서비스노조가 조합원 3033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실태조사 결과를 보면, 직장에서 괴롭힘을 당한다고 응답한 사람이 48%, 주 1회 이상 괴롭힘을 당한다고 호소하는 이들도 전체 응답자의 16%에 달했다.
대신증권의 경우 2014년 대규모 희망퇴직에 이어, 지난 6월 또다시 98명을 ‘희망퇴직’이란 이름으로 내보냈다. 증권업계 1위인 NH투자증권은 최근 “직무태만자를 징계하겠다”며 직원 21명을 윤리위원회에 회부해 논란이 일었다. 두 증권사를 중심으로 금융업계의 일자리 질을 평가했다. 사무금융노조 실태조사 중 두 증권사의 개별 응답도 입수해 분석했다.
창조컨설팅 용역받은 뒤 ‘저성과자’ 관리
“회사를 위해 젊음을 바쳐 열정으로 일해온 직원들을 퇴출 대상으로 분류해 ‘전략적 성과관리 체계’에 따른 직원 교육이라는 미명 하에 외지 전근, 막대한 감봉, 영업기반 박탈, 자존심 짓밟기 등 갖은 불이익과 막대한 스트레스를 주는 비겁하고 잔인한 행위를 자행했습니다.”
2014년 11월 대신증권 전현직 직원 13명이 회사를 상대로 체불임금 등을 청구하며 법원에 낸 소장은 이런 ‘절규’로 시작한다. 대신증권에서 5~26년동안 일한 대리, 차장, 부장급 직원인 이들은 모두 2012년 7월~2013년 10월 사이에 ‘전략적 성과관리 체계’의 대상자로 선정됐다. 직원들은 이를 ‘사실상 해고조치’라고 불렀다. 소송 당시에도 13명 중 9명은 압박을 이기지 못하고 퇴직을 한 상태였다.
대신증권이 ‘전략적 성과 관리 체계’라는 이름의 저성과자 관리 프로그램을 도입한 것은 2012년이다. 유성기업 등 여러 회사의 노조 파괴 컨설팅으로 논란을 일으킨 노무법인 ‘창조컨설팅’에 의뢰해 연구 용역 보고서를 받은 직후였다. 창조컨설팅의 용역 보고서의 제안대로 대신증권은 저성과 직원 퇴출이 가능하도록 취업 규칙 등 내부 규정을 개정했다.
이는 최근 고용노동부가 현행법상 퇴출 규정이 모호한 ‘저성과자’를 정당한 해고 사유에 넣는 것과 사측의 취업규칙의 개정을 손쉽게 만드는 등의 이른바 ‘노동개혁 지침’을 내놓은 것과 비슷한 방식이다. 고용노동부가 만들고자 하는 지침 내용을 대신증권은 한발 앞서 실행했던 셈이다.
소송을 낸 13명의 직원은 ‘전략적 성과 관리 대상자’가 된 뒤에 당한 수모를 이렇게 표현했다. “대신증권은 ‘전략적 성과 관리 프로그램’ 대상자를 현업에서 배제시킨 후 타 영업점과 본사를 1~2주 간격으로 오고가도록 보직을 순환하고 직무와 전혀 상관없는 지시(등산 후 산 정상에서 인증사진 찍어오기, 외부 명함 10장 받아오기)를 반복하게 함으로써 개인의 인격적 자존심을 짓밟아 잔류 의지를 상실토록 했습니다.” 그들은 소장을 통해 “전략적 성과 관리 프로그램 가동 2년 만에 100명 이상의 인원이 감축된 것으로 파악한다”며 회사 쪽에 시행 내역과 실제 퇴출로 이어진 명단 공개를 요구했다.
지난 4월8일 서울남부지법은 대신증권이 창조컨설팅에 용역을 의뢰한 뒤 전략적 성과관리 프로그램을 도입한 점, 2012년 2월부터 2년동안 대상자로 선정된 139명 중 교육 중 퇴직자가 37명에 이르는 점 등은 인정했지만 이 제도가 ‘사실상의 퇴출 프로그램'이라는 점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에 대해 대신증권 쪽은 “법원에서도 판결했듯 ‘전략적 성과관리 체계'는 성과가 낮은 직원을 대상으로 하는 교육 프로그램일 뿐”이라며 “시장 패러다임이 바뀜에 따라 역량을 키우자는 취지”라고 설명했다. 또한 “프로그램 도입 전 여러 곳에서 컨설팅을 받았고 창조컨설팅은 그 중 하나일 뿐”이라고 말했다.
2014년 302명, 2016년 98명 희망퇴직
‘전략적 성과관리 체계’는 2012년 당시 노동조합이 없던 대신증권에서는 아무런 제약 없이 프로그램이 실행됐다. 인사규정 개정으로 막강한 권한을 갖게 된 인사위원회는 성과관리 대상자, 즉 ‘저성과자’를 선정하기 시작했다. 당시 창조컨설팅이 대신증권에 제출했던 용역 보고서에는 “저성과자와 집중 면담을 통해 프로그램 시행 전 다수의 희망퇴직 유도”, “프로그램 중 잔류 욕구가 감소하는 시점에서 사직을 유도”, “프로그램 시작부터 끝까지 개별적, 비공식, 수시 희망퇴직 접수” 등 퇴직 유도를 위한 방법이 안내되어 있던 것으로 알려졌다.
2012년 ‘전략적 성과관리 체계’ 관련 교육을 담당하는 역량개발부 소속이었다가 2014년 노동조합을 설립한 이남현 지부장은 “처음에 회사는 이 프로그램이 직원 역량 강화를 위해 도입됐다고 말했지만 실제로는 40대 후반에서 50대 초반의 직원들을 힘들게 해서 나가게 하는 게 목표였다”고 밝혔다. 이 지부장은 “제도 도입 이후 실적 부진자로 낙인 찍힐지 모른다는 공포, 회사에 대한 배신감 등이 사내에 팽배해졌다”고 말했다. 이 지부장 역시 노조 활동 중이던 지난해 10월, 회사 기밀 유출 등을 이유로 징계해고됐다.
‘전략적 성과 관리 체계’에 따라 대상자로 지목됐다가 퇴직한 사람의 정확한 숫자는 알려지지 않았다. 공식적으로는 2014년 6월에 302명 희망퇴직을 했고 지난 6월 98명 희망퇴직을 했다. 2014년 퇴직자는 전체 공고가 났지만 지난 6월 퇴직은 ‘개별 알림’ 됐다.
저성과자 관리와 희망퇴직 단행으로 고용불안이 커진다는 지적에 대해 대신증권 쪽은 “희망퇴직의 경우 시행을 바라는 직원들도 많으며 오히려 대신증권은 업계에서 드물게 매년 정년퇴직자가 있는 회사”라고 설명했다. 대신증권에서는 2011년 7명, 2012년 18명, 2013년 8명, 2014년 9명, 2015년 4명이 정년퇴직을 했다.
매출액 3조~6조, 부동산 사들이는 경영진
대신증권이 최근 계좌별 수익인정율 등을 직원들에게 불리하게 바꾼 내용의 ‘영업점 성과체계 변경’과 ‘임금피크제 도입’을 결정하는 과정에서 직원들의 동의를 강요했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사무금융노조 대신증권지부가 지난 6월 직원 330명한테서 받은 설문 답변을 보면 전체 응답자의 96%가 ‘영업점 성과체계 변경’에 반대하고 58%가 ‘임금피크제 도입’에 반대하는 입장이지만 실제 사측의 동의서에는 92%가 동의한다는 서명을 한 것으로 나타났다. 동의하지 않는데도 동의한다는 서명을 한 이유로는 63%가 ‘동의하지 않았을 때 내게 올 불이익이 걱정돼서’라고 답했다. 지점장이나 부서장이 직접적으로 압박했다는 응답도 15%에 달했다.
대신증권은 지난해 말 기준 1367명의 정규직과 334명의 기간제 직원이 일하고 있다. 대신증권의 직원 수는 사업보고서 기준 2012년 2298명에서 2013년 2015명, 2014년 1675명으로 줄었다. NH투자증권의 지난해 말 직원 수는 3036명, 이 중 559명이 비정규직이다. 대신증권의 지난해 매출액은 3조2204억원, 영업이익은 1248억이었고 엔에이치증권의 지난해 매출액은 6조8929억원, 영업이익은 2917억원이었다.
두 회사 모두 직원 중 여성 비율 39% 수준, 근속연수 10.5년으로 비슷한 구조다. 대신증권 본사 관리직의 경우 여성 임금이 남성 임금의 55.8% 수준으로 남녀 임금격차가 큰 것도 비슷하다. 지난해 말 기준 NH투자증권의 상무보 이상 임원 37명 전원이 남성이다. 반면 대신증권의 경우 임원 중 여성 비율이 높은 편이다. 현재 전체 54개 지점 중 10곳의 지점장이 여성이다.
두 증권사 가운데 가장 높은 임금을 수령하고 있는 부서는 NH투자증권 본사 영업 담당 남성 직원으로 평균 근속 연수 6.8년에 평균 연봉이 1억5600만원이었다. 반면 가장 낮은 급여를 받는 곳은 대신증권의 영업·본사 관리직 여성 임금으로 평균 근속 연수 8년 8개월에 평균 연봉이 3800만 원에 그쳤다.
대신증권과 마찬가지로 NH투자증권도 대규모 구조조정 뒤 직원들이 고용불안을 느끼고 있다. NH투자증권은 2014년 우리투자증권과 NH농협증권의 합병 과정에서 600여 명의 직원이 회사를 떠났다. 지난 4월부터 사쪽이 직무태만을 문제삼아 직원들에 대한 징계를 시도한 데 이어, 추가로 일부 직원들에게 경고성 메일을 보내 전국사무금융서비스노조가 “대규모 부당 징계를 통해 강제 퇴직을 준비하는 수순”이라 비판하고 나섰다.
최근 부동산을 사들이는 두 회사의 행보도 비슷하다. 대신증권이 지분 전량을 갖고 있는 자회사 대신F&I는 지난 5월 서울 용산구 한남동 부지를 6242억원에 사들였다. NH투자증권은 지난 11일 7000억원을 들여 여의도 복합단지 ‘파크원’ 4개동 중 56층 짜리 초고층 빌딩을 매입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대신증권 오너 일가-직원 급여차 21.3배
두 회사의 임금 구조에서 가장 큰 차이는 직원과 등기임원의 임금 격차다. 등기 이사 3인 중 2인이 오너 일가인 대신증권의 경우 직원 1인당 평균 급여(7600만원) 대비 등기 임원 1인당 평균 급여가 18.22배였다. 모자 관계인 이어룡(62) 회장, 양홍석(35) 사장에게 지난해 지급된 보수총액은 35억4100만원으로 직원 급여와의 차이는 21.3배다. NH투자증권의 경우 직원(1억2000만원)과 등기임원간 격차가 3배 수준이었다.
대신증권 전현직 직원 68명이 기업 정보 공유 플랫폼 잡플래닛에 남긴 평가를 보면 다른 기업에 비해 특히 경영진 평가 점수가 5점 만점에 1.85점으로 낮았다. 지인에게 자신의 회사를 추천하겠다는 비율은 24%에 머물렀고 총만족도도 5점 만점에 2.5점에 불과했다.
직원들이 잡플래닛에 직접 남긴 회사 단점으로는 “직원의 소중함을 잘 모름”, “노를 외칠 수 없는 분위기”, “직원들에게 더 베풀면 인당 생산성도 높아질 것으로 보임” 등이 이어졌다. 회사의 장점으로는 “가족적인 면이 많아 회사에서 느낄 수 있는 유대감이 강한 편”, “전통과 역사에 대한 자부심이 크다”, “안정적이고 야근을 지양하는 분위기, 타사에 비해 업무강도도 세지않다” 등이 꼽혔다.
이에 대해 조경순 대신증권 상무는 “대신증권 직원들이 우리사주조합에 보유하고 있는 주식만 전체 주식의 4.83%에 이르고 회사에 대한 애사심과 만족도도 높은 편”이라고 말했다. 대신증권 인사부가 지난달 초 직원 858명을 대상으로 한 ‘직원 만족도 조사' 결과를 보면 회사 생활에 만족한다는 응답이 51.1%(만족 42.3%, 매우 만족 8.9%)로 나타났다. 지난해 하반기(55.6%)에 비해 조금 낮아진 수치다. 직원들이 가장 높은 점수를 준 항목은 “나는 우리 회사가 진정으로 잘 되길 기원한다”였다.
“직장 내 괴롭힘 당해” 대신 58%, NH투자 50%
전국사무금융노조가 지난해 11월 실시한 ‘직장 내 괴롭힘’ 실태조사에서도 두 증권사 근로자들의 열악한 근로환경이 잘 드러난다. 금융업계 종사가를 대상으로 한 이 설문조사 중 두 회사의 직원 응답만을 입수해 분석한 결과, 지난 3년간 구조조정이 증가했다는 응답은 NH투자증권이 58.6%(128명 중 75명), 대신증권은 61.5%(83명 중 51명)에 달했다. NH투자증권 응답자의 83.7%, 대신증권 응답자의 92.8%가 “경쟁·성과주의 증가했다”고 느꼈다.
대신증권 응답자의 54.6%는 주당 50시간 이상 일하고 있었고, 44.4%가 3명 이상의 부양가족이 있었다. 66.7%가 비정규직 고용이 늘었다고 느끼고 있었고, 75%가 업무 강도가 증가했다고 응답했다. NH투자증권의 경우 주당 50시간 이상 일한다는 응답이 37%, 비정규직 고용이 늘었다는 응답이 29%였다.
직장 내 괴롭힘을 당해본 경험이 있다는 응답은 대신증권이 58%, NH투자증권이 50%였다. 직장 내 괴롭힘 방법으로 직접적으로 “말을 듣지 않으면 해고 등 징계나 승진 불이익을 주겠다는 위협을 받았다”는 응답이 NH투자증권 20.4%, 대신증권 48.5%에 달했다. 달성 불가능한 목표나 퇴근 시간에 업무 지시를 받는 등 기한이 촉박한 업무를 받았다는 응답도 NH투자증권 27.4%, 대신증권 59.4%였다. 모임이나 교육 참여를 강요당했다는 응답도 NH투자증권 33.6%, 대신증권 55.1%였다. 괴롭힘 행동을 한 사람의 직급은 두 회사 모두 ‘직속 상사’가 가장 높게 나왔다. 괴롭힘의 원인으로 대신증권 응답자의 60.4%가 ‘회사의 경영 정책’을 지목한 반면 NH투자증권 응답자들은 ‘가해자의 인성’(47.1%)을 탓했다.
두 곳 모두에서 직장 내 괴롭힘을 경험한 직원들의 우울도가 높게 나타났다. 실태조사를 통해 증권사 직원들은 다른 이가 괴롭힘을 당하는 모습을 보면서도 모른체 지나친 적이 있다고 털어놨다. 자신이 괴롭힘을 당하고도 불이익을 당할까봐, 나만 이상한 사람으로 몰려 직장 내 관계가 더 악화될까봐 침묵했다는 이들이 절반 이상이었다. 직원들은 회사가 ‘직장 내 괴롭힘’에 대해 철저히 조사하고 가해자를 징계하는 한편 과도한 성과주의 정책을 변경하길 바란다고 응답했다.
실태조사에 참여했던 임상혁 노동환경건강연구소장은 “대신증권이 NH증권보다 비정규직 고용이 많았고, 성과주의가 심해졌으며, 구조조정이 증가됐고 이로 인해 업무 관련 괴롭힘이 계속 발생하고 있었다”며 “심화되는 경쟁과 실적 압박, 고용불안이라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직장 내 괴롭힘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임지선 허승 기자 sun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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