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맨해튼 증권거래소(NYSE) 앞의 월스트리트 도로 표지판. AP연합뉴스
미국 경제 전문가들이 자국 경제가 1년 안에 침체에 빠질 가능성을 2008년 금융위기 직전 조사 때보다 높게 본 설문조사 결과가 나왔다. 40년 만의 최악의 인플레이션과, 이를 잡기 위한 금리 인상이 맞물려 경제가 ‘역성장’할 것이라는 전망이 갈수록 짙어지고 있다.
<월스트리트 저널>은 53명을 대상으로 이달 16~17일에 한 설문조사를 종합한 결과, 전문가들은 1년 안에 미국 경제가 침체에 빠질 확률을 44%로 보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19일 보도했다. 이 신문은 2005년 같은 조사를 시작한 이래 경기침체에 돌입하지 않은 시기에 이 정도 수치는 거의 나온 적이 없다고 했다. 이 수치는 1월에는 18%, 4월에 28%였다.
1년 안에 경기 침체가 닥친다고 전문가들이 내다보는 확률 44%는 과거 경기 침체 직전보다도 높은 수준이다. 2008년 금융위기 직전인 2007년 12월 조사에서는 38%였고, 코로나19 사태로 1·2분기에 역성장을 기록한 2020년 2월에도 26%에 불과했다.
이번 조사는 연방준비제도(Fed)가 기준금리를 단번에 0.75%포인트 올리는 ‘자이언트 스텝’을 밟은 직후 이뤄졌다. 연준과 마찬가지로 경제 전문가들은 연말 기준 물가 상승률 전망을 더 높게 잡았는데, 4월에는 5.5%로 예상하더니 이번에 7%로 내다봤다. 5월 미국 소비자물가지수 상승률은 8.6%로 40년5개월 만에 최고였다. 전문가들은 인플레이션 대응을 위해 현재 1.5~1.75%인 기준금리가 연말에는 3.3%까지 올라갈 것으로 전망했다. 기준금리를 정하는 연준 연방공개시장위원회 위원들의 전망치 평균도 이와 비슷하다.
이는 우크라이나 전쟁 등의 영향으로 물가가 예상을 뛰어넘는 수준으로 오르면서 가파른 금리 인상이 불가피하고, 결국 경기 침체로 이어질 것으로 보는 시각이 늘었다는 얘기다. 제롬 파월 연준 이사회 의장은 7월에도 기준금리를 0.75%포인트 올릴 수 있다고 예고한 상태다.
미국 경제의 침체 돌입은 ‘1년 안’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일 수도 있다. 올해 1분기에 마이너스 1.5% 성장을 기록한 미국 경제가 2분기에도 비슷한 수준의 성장률을 보일 것이라는 예측도 나온다. 경제학자들은 한 나라 경제가 두개 분기 연속으로 마이너스 성장을 하는 상황을 경기 침체라고 정의한다.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의 한 주유소에 16일 1갤런(약 3.78ℓ)당 7.85달러(약 1만100원)가 넘는 휘발유 가격이 표시돼 있다. 미국의 보통휘발유 평균 가격은 최근 갤런당 5달러를 돌파했다. 로스앤젤레스/AP 연합뉴스
최근 수치들은 미국 경제가 인플레이션과 금리 인상의 영향으로 감속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5월 소매 판매는 0.3% 줄면서 올해 들어 처음으로 감소세를 보였다. <워싱턴 포스트>는 미국 국내총생산(GDP)의 3분의 2를 차지하는 민간소비가 위축되는 방향으로 가고 있고, 상품보다는 여행·식당·미용 등 서비스 소비 감소가 큰 편이라고 했다. 미국인들의 신용카드 빚은 이달 1일 기준 8680억달러(약 1124조원)로 1년 전보다 16% 증가하며 사상 최대로 늘었다. 그러나 금리 인상, 물가 상승, 주가 하락이 맞물리면서 소비 여력 축소가 불가피한 것으로 보인다.
재닛 옐런 재무장관은 이날 <에이비시>(ABC) 방송에 출연해 인플레이션과 금리 인상 때문에 경기가 둔화할 것이라고 말했다. 옐런 장관은 “연말까지 높은 인플레이션이 이어질 것”이라며 “경제가 감속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우크라이나 전쟁에 따른 에너지 시장 혼란과 중국의 코로나19 봉쇄로 인한 공급 차질이 곧 해결될 것으로 보지 않는다며 “인플레이션 수준이 받아들일 수 없을 정도로 높다”고 했다. 또 인플레이션의 거의 절반은 에너지 가격 인상과 그 여파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옐런 장관은 “경기 침체가 불가피한 것은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그는 가계의 소비 여력이 아직 충분하다면서, 경제 성장률이 떨어지겠지만 마이너스 성장이 이어지지는 않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워싱턴/이본영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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